존재의 목적
오늘날은 과학의 영향으로 거의 본능적으로, 습관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보자는 태도로 전달되는 메시지를 거부하죠. 회의주의 그것도 완고한 회의주의에 따라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심에는 세뇌에 의한 그런 악성 의심이 있고 논리적인, 합리적인, 타당한 의심이 있죠. 전자인 경우는 그 자체가 자가당착인데 그런 식의 의심하는 태도 자체를 마찬가지 시각으로 의심한다면 모순과 혼란에 빠지게 되죠. 거짓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목적이 있다는 명제는 법칙이죠. 사유의 법칙입니다. 이 점에 대해 회의한다는 것은 멸성의 고집을 피운다고 해야 할 정도로 악한 것입니다.
'존재'란 무엇이고 '목적'은 무엇입니까? 존재란 순한글로 '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자어로 '존재'나 혹은 '유'는 그 자체는 그대로 명사(名辭)와 빈사(賓辭), 언어적으로는 주어와 술어로 다 쓰일 수 있죠. 한국어로 '있다'는 형용사로 분류되는데 그에 상응하는 영어 단어 be는 동사이죠. 존재 혹은 있음이라고 표현하려면 being을 쓰죠. 그리고 한국어로 있음이라고 하는 것과 존재라고 하는 것은 크게 다른 뉘앙스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한국어에서 순한글에 상응하는 한자어가 있다면 영어에는 그리스라틴어계열의 어휘가 있죠. exist와 그 명사형 existence가 있죠. 그런데 존재를 영어로 옮기라면 being이 더 적합하다고 합니다.
존재나 being은 논리적으로 추상개념으로 사용되기도 하죠. 이글의 목적은 언어적인 면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아니므로 이 정도 하고, ...... '목적'도 추상개념이죠.
창조주가 첫 인간부부에게 입력시킨 어휘가 몇 개이고 그 에덴어에 정확하게 '존재'나 '목적'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었는지는 제 개인적으로는 뭐라 단정할 수 없지만 존재의 목적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회의적으로 생각해야 할 면이 전혀 없습니다. 진지하게 생각하고 연구하면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유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죠.
장미꽃은 눈과 의식이 없으므로 서로의 아름다움을 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으며 스스로 왜 존재하는지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한 기능들이 장미 안에 내재되어 있지 않죠. 식물은 일단 존재하게 되면 그 존재가 소멸할 때까지 한 곳에 있게 되는데 그것에 대한 답답함을 느끼지도 않습니다.
동물들도 그러합니다. 태어나서 먹고 번식하고 거니는 등 별 할 일도 없는 것 같은데 왜 존재하는 것입니까? 인간이 만든 것들 즉 인공물들은 애초에 목적을 가지고 만들기 때문에 그 존재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생물물질이나 동식물들은 왜 존재하는 것입니까? 간단합니다. 인간을 위해서입니다. 인간중심원리에 의한 것이죠. 논리적인 의심을 극복하고 확립된 것이죠.
인간은 순수한 지적 호기심을 갖고 있으며 그 호기심을 만족시킬 수 있게 하는 학문적인 사고력도 가지고 있죠. 그래서 대상을 연구하고 규명하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대상의 존재와 그것이 지닌 다양한 특성들은 인간의 삶의 의미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창조주에 의해 그렇게 만들어졌죠.
사유의 법칙에 따라 모든 존재하는 것은 목적이 있으며 창조법칙과 인간중심원리에 따라 그 존재의 목적은 인간을 위함입니다.
진리는 간명합니다. 부인하고 거스를 때는 그렇게 하는 인간의 존재가 소멸된다는 것도 법칙입니다. 멸망의 법칙이죠.
인간은 주어진 것들에 대해 창조주에 대해 감사하고 또 그분을 찬양하면서 사랑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면서 우주를 개척하는 일을 하면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 그 존재목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