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배할 수밖에
육을 지닌 우리 인간은 숨을 쉬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음식을 먹으며 살아야 하고 잠도 자면서 살아야 합니다. 아무도 부인하지 않죠. 대소변도 보면서 살아야 하는데 배설뿐 아니라 심지어 먹는 것도 구차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쩝쩝 거리며 음식물을 씹어 먹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만 느끼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이도 닦아야 하고 항문도 닦아야 하죠. 그런데도 살려면 계속 그렇게 해야만 하죠.
근근이 끼니를 때우며 필수적인 것을 위해 힘들게 살아야 하는 경우 더욱 그렇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비정상적인 감정일 수 있죠. 인간은 무엇인가 생각하며 어떻게든 느끼며 살게 되죠. 의식작용이 생기는 것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것으로 해서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르려고 해도 그것마저도 의식작용이죠. 이 정도도 대부분 인정합니다.
인간은 여러 섭리나 본성에 따라, 그러한 것에 전적으로 수동적이 되어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 중 숭배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선천적인 본성이 아니라 문화적 강요에 의한 체득된 습성으로 벗어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데 창조주가 더 잘 아는 것이죠.
인간은 무엇인가 숭배하게 되어 있고 심지어 나무나 돌 등으로 인공물을 만들어서라도 그렇게 해야 마음이 편한 것입니다. 우상이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은 사형죄에 해당하죠. 오늘날도 불상이나 마리아상, 십자가 등등 적어도 숭배의 보조물로 사용되는 인공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에 절을 하거나 입을 맞추죠. 그래야 마음이 편하여 자발적으로 그렇게 합니다.
나는 그러한 것을 믿지 않고 내 주먹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약육강식을 믿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력의 신을 섬긴다고 할 수 있죠. 배금사상이라는 말이 있는데 돈에 대한 숭배라는 뜻이고 국가주의라는 것은 국가에 대한 숭배로 기에 대한 경배로 그것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 5절에는 "탐욕스러운 자 곧 우상 숭배자는"이라는 표현이 있죠. "탐욕은 우상 숭배입니다.(골 3:5) 그들의 신은 자기들의 배이며(빌 3:19)"와 같은 의미이죠.
필요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이 욕망이죠. 그러니까 욕망 자체가 그릇된 것이죠. 그런데 그 욕망이 과한 것이 탐욕이죠. 음식이나 성이나 돈, 권력에 대한 과하거나 부당한 욕망 그 자체를 숭배라고 규정하고 있고 영원한 멸망에 처해지는 죄이죠.
성서에는 일관성 있게 숭배의 유일한 대상은 창조주이며 특히 예수가 이를 강조하죠. 예수 자신을 숭배를 대상으로 만든 기독교는 이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숭배는 종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는 거짓되고 악한 것이죠.
인간은 살려면 숨을 쉬어야 하고 먹어야 하죠. 그것 자체가 힘겹고 구차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살려면 그렇게 해야 하죠.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지극한 행복을 느끼는 경우가 있고 먹는 즐거움이 행복의 큰 부분이라고 하는 경우도 많듯이 원래는 숭배 자체가 행복입니다.
인간에게 하느님을 숭배하는 것은 뭔가 자유를 억압받는 것이고 행복을 제한받는 것으로 느끼는 집단무의식이라는 것이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 세상 신인 사탄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와에게 그런 식으로 주장하여 선악과를 먹도록 유혹하였으니까요.
실상 종교들이 자유를 억압해 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금욕을 권장하고 결혼을 금하기도 한 것이죠. 그러한 것들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골 2:23 딤전 4:1~4)) 오히려 진리를 알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자유를 남용하지 말라는 경계를 받고 있는 정도이지요.(베드로 첫째 2:16; 갈라디아 5:13)
인간이 탐욕을 부리는 이유는 그것이 숭배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래야 마음이 편한 일면이 있기 때문이죠. 숭배본능을 그렇게 만족시키는 것이죠. 우상에게 절을 해서 숭배욕을 만족시키는 것이나 탐욕을 부려 그렇게 하는 것이나 본질상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모두 사탄숭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숭배라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뭐든지 숭배하게 되어있죠. 공기가운데 숨을 쉬며 살아야 하듯이 숭배가운데 살아야 하는 것이죠. 어떤 공기를 호흡하며 사느냐 하는 선택일 뿐입니다. 치사적인 공기를 마시며 사느냐 생명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사느냐 하는 선택이 있을 뿐입니다. (엡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