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속의 성장 : 인생의 쓰디쓴 순간들

by blandina

그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4년을 일하던 내 피와 살 같았던 회사를 그만두고,


이번에는 미국 전역에 180개 매장을 가진 중국 마켓의 베이커리 팀에서


한국 케이크를 만드는 사람을 찾고 있다는 오퍼를 받았다.


그 덕분에 해당 기업 사장님의 추천으로 대기업에 입사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곳 역시 만만치 않은, 무서운 중국 회사였다.

미국회사에서 일하면 다소 편안할 줄 알았던 나는 곧 깨달았다.

그들은 미국에서도 마치 중국에서 일하듯 10시간, 12시간씩 일을 강요했다.

칼퇴근을 하거나 오버타임 급여를 요청하는 나를 동물원 원숭이 보듯 대했다.

"여긴 미국이야, 이 사람들아!" 속으로 몇 번이나 외쳤다.


본사 베이커리 팀 전원이 중국 사람이었고, 대화는 늘 중국어로만 이루어졌다.

나는 대화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어 그저 웃음으로 상황을 넘겼다.

중국어 특유의 시끄럽고 날 선 어조가 나와는 맞지 않았다.

가끔은 그들이 내 험담을 하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어

애플워치로 회의 내용을 녹음해 동생에게 보내기도 했다.

다행히 욕은 아니었지만, 본사에 가기만 하면 마치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필드 트레이닝 매니저로 일하면서 캘리포니아 전역을 운전하며 매장을 방문했다.

그런데 매장마다 관리 상태가 정말 심각했다.

미안한 말이지만, 역시나가 역시나 더러움의 끝판왕인 중국사람들 다웠다.

중국에 살고 있는 동생을 만나러 두세 번 여행을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동생에게 말하곤 했다.

"더운 건 참을 수 있어도, 더러운 건 못 참겠어."


중국 회사에서의 6개월은 그렇게 끝이 났다.

중국 사람들과는 문화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맞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들도 아마 한국인인 내가 눈엣가시처럼 보였을 것이다.

8년째 중국에서 살고 있는 동생이 새삼 대단해 보였다.


중국 회사를 그만둔 뒤,

이 좁디좁은 한인 커뮤니티에서 더 좁은 베이커리 업계에서

새로운 자리를 찾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나 마찬가지 일 정도로 힘든일이다.

그러다 한인타운의 작은 카페 겸 베이커리에서 총괄을 맡을 제빵사를 구한다는


구인광고를 보고 인터뷰를 하고 일을 시작했다.


그 사장님은 지금 생각해도 정말 궁금한 사람이였다.

혹시 한쪽 눈만 뜨고 다니시는 걸까?

아니면 그 매장 자리에서 금이라도 쏟아질거는 헛된 희망인걸까?


무슨 생각을 하셨던 걸까?

지금도 궁금하다.

왜 이름 없는 개인 베이커리를

미국에서 이미 대히트를 친 파리바게트 바로 앞에 차리셨을까?


결국, 실패가 예정된 장사였다.

프랑스에서 날고 긴다는 셰프가 와도 살릴 수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빵과 케이크는 만들어야 했기에,

나는 새벽부터 출근해 일했다.


결과는 뻔했다.

사장님은 3개월쯤 지나자 월급을 주지 않으며 나를 피해 다니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돈을 받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또 한 번 한국사람에게 배신을 당했고, 자존감은 바닥으로 추락했다.

낮술을 마시며 하루하루 폐인처럼 살아갔다.

사실 그렇게 망가지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때쯤, 제빵 사수님에게 연락이 왔다.

한인타운에서 가장 크다는 카페 베이커리에서

케이크를 만드는 사람을 찾고 있다고 했다.


이력서를 넣고 인터뷰를 했고, 사장님이 나를 매우 마음에 들어 하셨다.

그렇게 그곳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여전히 깨닫게 된다.


"어딜 가나 한국 사람이 제일 무섭다."


외국에서 사는 '한국인의 절반은 사기꾼'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민 생활 22년, 이 진리는 뼈저리게 느껴왔다.


100% 장담할 수 있다.


이 말은 정말 머릿속에 깊이 새겨두고 살아야 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내 나이는 44세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