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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밤, 비행기와 함께 떠나 도주
만삭의 임산부가 되어 한국으로 야반도주를 하다.
by
blandina
Nov 27. 2024
시어머니는 조씨 아저씨가 18살 때부터 아들이 벌어다주는
피아노 레슨비로 생활비를 했다고 했다.
시아버지가 한국에서 일을 하셔도 시어머니는 시아버지를 따라가지 않고
아들들을 핑계 삼아 남미에 사셨다.
본인들은 한국에서 날고 기며 잘 나가시던 강남토박이에,
그 옛날에 양쪽 집안이 그렇게 부유하게 잘 사셨다고
입이 마르고 닳토록 자랑을 하셨다.
시아버지는 법대를 나오셔서 나같은 2년제는 사람 취급도 안 하신다는것을...
시어머니 또 어찌나 교양과 품위를 따지시는지 그런 분들의 자녀라면 그들도
교양과 품위가 있고 그들이 말하는 배운 집안 사람들은 뭔가 달라야 하지 않는가?
맞다 살아보니 달랐다!!
내가 사는 세상과 그들이 사는 세상은 내가 죽을때 까지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분류와 유형이였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왜 아들들이 어려서 부터 벌어 온 돈으로 생활비를 하셨는지
언제나 그분들의 행동과 말은 앞뒤가 전혀 맞질 않았다.
결혼을 하고 나서야 알게 된 많은 일들에 나는 정말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 충격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내 인생의 "막장 서막"이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배가 부르다 부르다 터지기 직전인 8개월째,
어느 날,
문득 옷장 깊숙이 넣어둔 결혼식때 받은 패물들을 꺼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때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여자의 촉은 무섭다 그것 또한 진리이다!!
집에 청소하러 오는 원주민 아줌마가 있어서,
중요한 물건들은 가끔씩 잘 확인해 보라고 주위에서 말하곤 했다.
하지만 그 날은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그냥 정말 느닷없이 그 패물을 꺼내 보고 싶었다.
엄마가 결혼식 때 가져오신 분홍 보자기에 두세 번 싸서 옷장 구석 깊숙이 넣어둔
패물 위에 다른 물건들이 쌓여 있어 내가 아니면 찾지 못할 물건이었다.
그런데 그날, 그 옷장, 그 자리에 그 패물이 없었다.
왜? 어째서?
패물이 발이라도 달려서 도망갔을 리는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나는 당황스러운 마음으로 조씨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 옷장에 둔 패물 본 적 있어요?
아니면, 설마 일하는 아줌마가 가져간 건 아니겠죠?”
내가 의심 섞인 목소리로 묻자, 조씨 아저씨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다시 한 번 잘 찾아봐.”
그리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때 나는 왜 내 남편이란 사람을 제대로 알지 못했을까?
아니,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모를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나는 그를 의심하고 싶지 않았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 느껴지는 의심조차도 소용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며칠이 지난 후, 조씨 아저씨는 결국 고백했다.
“회사에서 수표가 부도날 위기였어. 급하게 현찰이 필요했어.”
미친놈아!
내 머릿속이 하얘지며 화가 치밀었다.
몇 달 되지도 않은 패물을 팔 거였으면 처음부터 사주지나 말지,
왜 굳이 돈을 반토막 내며 팔았냐고!
결국 나의 패물 세 세트는 내가 한 번도 끼워보지 못한 채 어딘가로 팔려가고 말았다.
그때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나는 어리석게도 조씨 아저씨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그렇게 몇 달을 버티고 또 버티던 조씨 아저씨의 회사는 결국 부도가 났다.
그리고 우리는 야반도주를 할 수밖에 없었다.
결혼 몇 개월 만에 쫄딱 망한 남편을 데리고,
나는 배불뚝이 임산부가 되어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천만다행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어쩔 수 없었다고 해야 할까.
한국에 엄마, 아빠가 계신 집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어디 딱히 갈 데도 없었고, 당장 아이도 낳아야 했기 때문이다.
모든 생활비는 엄마, 아빠가 책임지셨다.
사실 친정 엄마는 당시 자궁암 말기 수술을 받으신지 몇달 안되셔서 요양 중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은 내 상황을 이해해 주시고, 모든 것을 도와주셨다.
금전적인 도움까지 포함해서.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 친정이 결코 잘사는 집이 아니라는 것이다.
너무 평범해서 신물이 날 정도로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오신 분들.
온몸으로 일 평생을 일해 겨우 집을 장만하시고, 이제 좀 숨 돌리려 하시는 중이었다.
그런데 딸이 결혼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가 암 판정을 받으시고
수술 후 회복 단계에서 간호사의 실수로 요단강을 두세번은 건너셨었다고 한다.
그렇게 오만가지 힘든일들이 겹겹이 겹친 우리 가족에게 딸은 빈털털이,
배불뚝이가 되서 야반도주를 해 남편까지 달고 한국으로 돌아왔던것이다.
그럼에도 부모님은 모든 것을 감내해 주셨다.
그에 반해 조씨 아저씨의 집안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규칙 같은 게 있었다.
"군대는 절대 가지 않는다."
듣도 보도 못한 그런 신조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해를 할래야 할 수 없는 집안이었다.
조씨 아저씨도, 그의 동생도 군대를 가지 않았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군대에 가지 않은
이민자는 만 36세가 되기 전까지 6개월 이상 체류할 수 없었다.
6개월 체류 제한 규정 때문에 조씨 아저씨는 나와 아이를 남겨두고 남미로 돌아갔다.
나는 또다시 몇 달 동안 아이와 함께 친정집에서 지냈다.
다행히 엄마는 아이를 보며 행복해하셨다.
그 시절, 아이는 그저 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유일한 존재였다.
몇개월이 흐른 뒤, 마침내 나는 아이를 데리고 남미행 비행기에 올랐다.
태어날 때부터 순하고 잘 먹고 잘 자던 아이는 36시간의 긴 비행 내내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세상 얌전하게, 마치 엄마의 힘든 마음을 알고 있는 것처럼
나를 전혀 힘들게 하지 않았다.
큰아이를 떠올리면 지금도 그 기억이 선명하다.
크는 동안에도 아이는 단 한 번도 내게 큰 걱정을 안겨주지 않았다.
오히려 늘 나를 도우려는 마음으로 살았다.
동생들을 아빠보다 더 잘 돌봐주었고,
어딜 가든 예의 바르고 어른들에게 인사성이 바르다고 칭찬일색이였다.
공부도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고, 엄마 말이 세상의 법인줄 알고 사는 아들이였다.
심지어 나 조차도 가끔 이렇게 생각할 정도였다.
“내가 이런 아들을 낳다니. 정말 복받은 거 아닌가?”
그렇지만 늘 평탄하기만 한 인생은 없었다.
올해 아들이 미군에 입대를 하게 되었다.
아들의 군입대에도 사연이 많지만 그건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꺼내서 얘기해 보도록 하겠다.
훈련소에서 여친과 결혼을 하겠다고 이야기를 꺼냈을 때, 처음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모든걸 동원해 큰아이를 설득시키려고 했다.
울어도 보고, 달래도 보고, 윽박도 질러 보고, 인연을 끈자 으름장을 놓아 보기도 하고...
그럼에도 아들은 그 모든걸 감수하겠다고 하며 엄마의 말도 틀리지 않지만
자기의 결정도 틀리지 않다는걸 보여주겠다며 훈련소에서 결혼식을 강해하고 말았다.
당연히 반대하는 나는 참석하지 않았다.
큰 아들에 대한 배신감이라고 해두자...
하지만 한편으론 알 것 같았다.
사춘기도 없이 순탄하게 자라온 아들이
언젠가는 자기 뜻대로 큰 결정을 해보고 싶었을 거라고.
그래서 겉으로는 반대했지만, 속으론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 이번 한 번은 네 뜻대로 해봐라. 네 인생을 네가 선택해서 살아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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