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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시작, 악연
22살의 나의 이상형과 그 반대되는 사람과의 결혼의 시작
by
blandina
Nov 26. 2024
그날부터 나는 회사에 가는 것이 조금씩 행복해지기 시작하며 아침이 기다려졌다.
화장이란건 해본적도 없고 할 줄도 모르는 메이크업 똥 손인 내가
아침마다 한껏 꽃단장을 했다.
얼굴은 내가 어찌 할 수 없게 태어 났으니 나름 나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패션에라도
한껏 힘을 주었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그냥 그 분을 지켜보며 시간을 보냈고,
결국 나는 용기를 내어 책상에 쪽지를 남겼다.
나는 누군가가 나에게 고백을 하지 않는 이상 연애를 하지 않는다
그때는 키 크고 기럭지가 긴 거 말고 나에게 장점이 딱히 없다고 생각했었고,
너무나도 동양적이 내 얼굴이 싫을때도 있었기 때문에 내가 먼저 누굴 좋아하거나
고백하는건 생각해 본적 조차 없었다.
그래서 어렸을때부터 나의 연애는 나에게 대시하는 사람들과만 시작을 했었다.
그런 나에게 그 회사 선배 분은 그 모든걸 초월할 정도로 나의 이상형이였다.
내 이상형이 수트 차림이 멋진,
말 그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는 상 남자요' 이렇게 써 있어야 매력이 느껴졌다.
몇 일 뒤,
그분에게 연락이 왔다.
세상에 정말 나에게 연락이 왔다고?
하지만 그 연락을 받고 나서 나는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그분은...
어마어마하게 참기름을 짜내는 냄새가 나다못해,
꼬순내가 진동한다고 할 정도로 풋풋한 결혼 6개월 차의 신혼부부였던 것이다.
정말 상상도 못했던 그런 상황이었다.
그분은 본사의 부르심에 의해 어쩔수 없이 부산에 와이프를 두고
혼자 서울에 올라 오셨고, 와이프 분과는 주말 부부로 지내고 계시다고 하셨다.
내 세상은 그 순간 무너졌다.
당연히 포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게 인생을 편하게 만드는 길이란걸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분은 그런 호감을 표현해 준 오히려 나를 신기하게 생각했다.
내가 상상한 것보다 그분은 나이가 많았다.
내 나이 22살에 그분은 36살이었다.
내 눈에는 26살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 나이차이가 더 놀라웠다.
지금,
내가 44살이 된 이 순간에도 그분의 후광이 아직도 생생한걸 보면,
그 분은 정말 연예인이나 모델급의 외모와 후광을 지닌 분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인생은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변수로 가득하다.
그 해 6개월은 내 생애에서 지우고 싶은 끔찍한 실수로 남았다.
그때부터 내 인생의 방향이 엇나가기 시작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모든 순간을 통째로 지워버리고 싶고, 두번 다시 생각 하고 싶지 않은 시간이다.
그때쯤 나는 전 남편인 조씨 아저씨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국민학교 시절에 남미로 이민을 가,
나를 만날 당시 남미에서 패션 관련된 사업을 하고 있었다.
그때 내가 왜 그와 얽혔는지,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인연이었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만약 내가 하늘나라에 가게 된다면, 나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 물을 것이다.
왜 하필 그 사람을 만나게 하셨는지, 왜 하필 그곳에서 내가 그와 함께 해야 했는지.
하지만 사실 나는 그 답을 알고 있다.
그 답은 바로 나 자신이다.
조씨 아저씨 그리고 그 가족들과 함께하며 내가 경험한 모든 일이 결국
나를 지금의 나로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사람들 덕분에 이리 저리 깎이고, 부딪히며 살아왔고,
그 과정 속에서 나는 조금씩 나 자신을 알아가며 변해갔다.
그때의 나는 아마도 강가의 거칠고 울퉁불퉁한 바위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그때 그렇게 살아가면서 나는 지금의 내가
더 단단하고, 더 이쁘고, 더 빛나는 조약돌이 되었음을 느낀다.
결혼 생활 15년 동안 나는 부모님을 많이 원망했다.
왜냐하면 내가 부모님께 배운 것은 전통적인 가치관들 이었기 때문이다.
어른을 공경하고, 남편에게 순종하며,
여자는 무조건 참아야 하고,
자식을 가진 여자는 절대 이혼하면 안 된다는 그런 사고방식을 배웠다.
그것이 우리 부모님의 철칙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 마치 남미판 조선시대의 여인처럼 살았던 것 같다.
부모님 때문에 이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결혼식을 남미에서 했고,
한국에 있는 친인척들과 교회의 지인들은 모두
"딸 시집 잘 가서 호강하며 살게 되니 비행기도 태워주는 거"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주변의 어느 누구도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때 당시 내 아버지는 신학 공부 중이셨고, 교회 일도 하고 계셨다.
지금은 목사님이 되어 교회를 섬기고 계시며,
신학 대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계신다.
우리 집은 정말 뼛속까지 기독교 집안이었다.
작은아버지는 20대 후반에 목사님이 되셨고, 고모들은 전도사이셨으며,
고모들의 자녀들은 목사나 전도사들과 결혼을 했다.
그런 집안의 딸이 성당에서 결혼식을 한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결혼이란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들이 아닌 딸이었기 때문에, 출가 외인으로 시댁을 따라야만 했던 것이다.
나는 모태신앙으로 자란 기독교인이었지만,
시댁은 카톨릭이였기에 결혼식을 성당에서 하려면 혼배성사를 받아야 했고,
카톨릭식 세례를 다시 받아야 했다.
결국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렇게 성당에서 결혼식을 하게 되었다.
결혼식 날, 성당은 눈물 바다가 되었다.
신부 입장하는 순간부터 나는 대성통곡,
누가보면 결혼식장이 아닌 초상집인줄 알 정도로 눈물을 쏟아 냈다.
그 모습을 보며 하객들,
특히 우리 엄마 그리고 얼마 안 되는 나의 친구들까지 눈물바다가 되고 말았다.
결혼식이 끝나고 퇴장을 할 때, 나 만큼이나 하객들이 눈이 퉁퉁 부어 있었고,
그 장면이 너무 죄스럽고 민망했다.
퇴장 후, 겹겹이 쌓아놓은 신부 화장과 속눈썹은 온대간대 없이 다 사라지고,
신부 화장을 언제 했었냐는 듯이 생얼임을 알게 되었다.
그 순간에도 나는 왜 그 길을 빠져나오지 못했는지 이해 할수 없지만 그때는 그랬다.
부모님께 미안한 마음, 그리고 이미 던져진 주사위.
그 모든 것이 나를 결혼 생활로 밀어 넣었다.
결혼 한 달 전, 나는 웨딩 촬영 중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결혼식 후 시작된 입덧은 내 삶을 완전히 뒤흔들었다.
24시간 중 20시간을 자며 두통과 싸워야 했다.
그래서 나는 2002년 월드컵 경기를 단 한 경기조차 보지 못했다.
남들이 그렇게 열광하던 그 순간은 내 인생에서 존재하지 않는 기억이다.
결혼 후 알게 된 진실은 충격적이었다.
조씨 아저씨는 '사업가'라고 했지만, 실상은 사기 결혼이었다.
그가 말했던 회사는 그의 돈이 아니라 거래처의 수표들로 유지되는 곳이었다.
내가 파혼을 하지 않은 이유는
임신한 몸으로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는 그 모든 시간이 나를 지금의 나로 만들어준 과정이었다고
받아들이려 한다.
하지만 당시의 나를 떠올리면, 그 모든 고통과 희생이 생생히 떠오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 나는 여전히 살아가고 있고,
내 이야기를 기록하며 나 자신을 더 단단히 세워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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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셋 며느리 하나 싱글맘으로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살아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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