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살의 어린나이에 맞이한 엄마라는 삶

23살 어린엄마의 불지옥의 시작과 시집살이

by blandina


남미 공항에 도착했다.

그 순간,


내가 또 다시 새로운 지옥불로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백수가 된 조씨 아저씨 덕에 우리는 시댁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부터 거기서 나는 본격적으로 시집살이를 시작했다.


조씨 아저씨가 총각 때 쓰던 방에 우리 세 식구가 함께 살림을 차렸다.


그때 내 나이는 고작 23살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나도 정말 어린 애기였다.


젖살 오른 뽀얀 얼굴에 솜털이 가득한, 아직 어린 소녀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어린 나이에 애를 낳고, 그 애를 키웠다.


그뿐만 아니라,


신기하게도 나는 웬만한 일 들을 다 잘 해냈다.


그런 능력은 아마도 부모님 덕분이었을 것이다.


어릴 적 맞벌이하시는 부모님을 도와 집안일을 일찍 배웠다.


엄마와 아빠 모두 가족이 많아 친척 집에 자주 놀러 다녔는데,


그때마다 꼬마들을 돌보며 자연스럽게 아이들과 잘 지내는 법을 익혔다.


그런 시간들이 쌓여, 나도 모르게 ‘엄마’ 역할을 해낼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 같다.


우량아로 태어난 아들에게 모유수유를 충분히 해주지 못한 것이 늘 미안했다.


결국 분유와 모유를 섞어 먹였는데,


그 미안함을 덜어보고자 이유식에 좋다는 온갖 채소를 솥에 우리고 우려내어


그 물로 분유를 타서 먹였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요리만큼은 잘했다.


아마 외할머니와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일 것이다.


외할머니는 직접 술을 담가 손님을 대접하실 정도로 음식 솜씨가 좋으셨고,


엄마는 한때 해물 칼국수집을 운영하셨다.


엄마의 반찬을 맛본 사람들은 모두 “기절할 정도로 맛있다”며 엄마의 음식을 극찬했다.

나도 어릴 적부터 엄마의 김치 담그는 모습을 지켜보며


조미료를 담당하는 보조 역할을 맡았다.


위로 오빠, 아래로 남동생인 나는 딸인 죄로,


7살 때부터 명절이면 전 부치는 일은 늘 내 몫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전 종류는 쳐다보기도 싫다.


그런 배경 덕분인지,


나는 아이 이유식부터 시부모님 식사까지 별 어려움 없이 척척 해냈다.


어린 나이에 시부모님께 얹혀 사는 것이 죄송했고,


남편이 벌여놓은 일이지 시부모님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분들도 나이에 맞지 않게 아들 때문에 고생하시는 것이 안쓰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그때뿐이었다.


한국 속담에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나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다면 이 모든 상황을 알게 될 것이다.

내 남미 절친은 시부모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한국 드라마 막장의 총집합이다. 이건 기네스북에 올라야 해!”

나는 기네스북까지는 오버라고 생각했다.


사실 '미스터리물’이나 ‘그것이 알고 싶다’ 같은 프로그램에서


다룰 법한 이야기였다.

진짜 막장은 보통 며느리가 사라지는 것으로 끝나지만, 나는 아직 살아 있다.


그래서 기네스북 수준은 아니라고 스스로 위안했다.


그 무렵, 조씨 아저씨는 핸드폰 수리점을 내겠다고 나섰다.

없는 돈을 들여 수리하는 것을 배우고 자그마한 수리점을 열었지만,


당연히 잘 될 리가 없었다.


게다가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총쏘는 게임을 하며 스트레스를 푸는


조씨 아저씨의 모습은 정말이지 꼴보기가 싫었다.


내 남동생이었다면 뒷통수를 후려갈기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멍청하고 순종적인 사람이었다.


“그래, 본인도 스트레스 풀 곳이 있어야지”라고 생각하며 모든 것을 이해하려 애썼다.


그러던 어느 날,


시아버지와 조씨 아저씨가 파이팅 넘치게 싸움을 벌였다.

문제의 발단은 결혼 전에 아들이 시아버지 몰래 어머니와 짜고


돈을 가져다 쓴 것이었다.


그날 두 사람의 싸움에서 새우등 터진 건 결국 나였다.


시아버지 돈도 우리가 갚아야 할 빚이 되어버렸으니까.

도대체 어째서 조씨 아저씨는 그 나이가 되도록


**‘니 돈, 내 돈, 남의 돈’**에 대한 기본 개념조차 없는 건지 어이가 없었다.


결국 파이팅 넘치는 싸움이 끝난 뒤,


우리 세 식구는 돈 한 푼 없이 방 한 칸짜리 아파트로 이사를 가야 했다.

세상에, 자다가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그나마 모든 것을 감내하려 애쓰던 내 마음이 완전히 무너진 건 얼마 지나지 않아


둘째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다.

갓난아기 하나도 감당하기 벅찬 상황에서 둘째라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씨 아저씨는 핸드폰 가게를 접겠다고 했다.

사실,


나는 물론 모든 사람이 알고 있던 당연한 결말이었다.

애초에 맨날 큰돈만 만지던 사람이 조무래기 같은 돈으로 만족할 리 없었다.

게다가 장사가 잘될 리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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