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운드 12
증거
(라운드 12)
창 밖으로 붉어진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벌써 하나 둘 떨궈내고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것들도 있었고, 아직도 그러지 못하고 끝까지 미련을 붙잡는 것들도 있었다. 그래서 사람도 자연의 일부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녀는 그의 집에서 무더운 여름과 서늘한 가을을 지나 다가올 겨울을 바라본다. 시리고 쓰린 겨울은 하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스친다. 날카로운 칼로 베이는 아픔을 느끼며 애써 그다음 계절을 떠올려 보지만, 정말 봄이 오긴 오려나 싶다. 날이 차면 달도 기울고 때가 되면 계절이 바뀐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리 모든 것이 더디고 낯설게 보이는 것일까. 그러다 문득 그가 퇴근 후에 같이 영화를 보자고 했던 게 생각나서 그녀의 입가엔 슬며시 미소가 번진다. 너무 혼자 집에 있으니 자꾸 우울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아서 그녀는 그의 회색 후드티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그녀는 시몬을 떠올린다. 우리도 언젠가는 이렇게 우수수 떨어져 바람에 날리겠지. 정처 없이 뒹굴뒹굴 구르다가 누군가의 발에 밟히고 으스러질 운명, 그래도 좋으냐 시몬.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이어폰을 챙겨 왔지만, 굳이 귀에 꽂지는 않는다. 그저 낙엽의 비명소리를 조용히 귀담아듣는다. 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고개를 숙인 채, 발끝을 바라보며 거리를 걷던 그녀의 앞에 시커먼 뭔가가 가로막았다.
검. 정. 재. 킷.
그녀는 흠칫 놀라서 뒤로 물러섰지만, 그때 그 사내는 몸을 기울이며 한 발 그녀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녀가 왼쪽으로 몸을 비틀면 그도 왼쪽으로, 그리고 그녀가 오른쪽으로 몸을 비틀면 그도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가을의 거리에서 그들은 데칼코마니 같은 춤을 추고 있었다. 뒷걸음치려던 그녀의 입술이 갑자기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뮤지컬의 한 장면처럼 알 수 없는 사내와 길거리에서 춤이라니.
"풉, 하하핫..... 도저히 못 참겠어."
검정재킷은 갑자기 웃음이 터진 그녀를 보고 당황했지만, 아무 말이 없었다. 그 대신 왼손을 재킷 안쪽으로 넣어서 뭔가를 꺼내려고 했다. 한참을 웃던 그녀는 순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칼일까? 총일까? 도대체 이 남자는 왜? 짧은 사이에 그녀는 머릿속에 많은 질문들이 쏟아졌다. 여기서 죽으면 굉장히 억울할 것 같았다. 오늘 저녁엔 지훈과 영화도 보기로 했는데 하필.
"제 명함입니다."
"예?"
그는 놀라서 그대로 멈춘 그녀에게 네모난 명함을 하나 건넸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가 내민 명함을 받아 들었다. 명함을 자세히 들여다보던 그녀는 눈을 크고 동그랗게 뜨고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진짜예요? "
"그럼요."
그녀는 그제야 훤칠한 키와 잘 생긴 얼굴의 그가 눈에 들어왔다. '동백 엔터테인먼트, 캐스팅매니저, 김명수.' 명함엔 그렇게 쓰여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녀에게 명함을 주는 것일까.
"그런데 저기요, 왜 저에게 이걸.....?"
"아, 캐스팅하려구요. 저번에 마트에서 처음 봤을 때, 느낌이 딱 왔거든요. "
"네에? 느낌이라뇨?"
"뭔가 뻔하지 않은 매력을 가졌다고 할까.... 암튼 저의 촉을 믿고 싶네요."
"아니, 그럼 그때 마트에서 저를 따라온 게....."
"아, 놀라게 했다면, 정말 미안해요. 꼭 캐스팅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여기까지 오게 됐구요."
"아...... "
그녀는 이 남자가 모두가 알 만한 대기업이나 기관의 비밀수행원이 아닐까 짐작했는데. 그래서 그녀에 대한 정부의 시체놀이에 대항할 거대한 세력으로 작용해 주길, 부디 그녀를 보호해 주길 바랐는데. 이쯤에서 그녀의 상상의 나래도 고이 접어야 하는가. 그녀는 김 빠진 콜라처럼 풀이 죽었다. 곱디곱던 세상이 갑자기 싱거워졌고, 이 쥐덫에서 빠져나갈 구멍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망이 따라왔다.
"혹시 실망했어요? 연예계 쪽으론 관심 없나요?"
"그게...... 제가 사정이 있어서...... 되도록 조용히 살고 싶네요."
"아, 이 바닥이 좀 시끌시끌하긴 하죠."
그가 왼손으로 머리를 슬쩍 긁으며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괜히 미안해져서 그에게 그의 명함을 내밀었다. 그는 바로 손사래를 치며 그녀에게 말했다.
"아뇨, 그냥 잘 넣어둬요. 언젠가 필요하면 연락 줘요."
"저는 정말 그럴 일이 없을 것 같은데요?"
"기다릴게요. 그럼."
검정재킷은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어디론가 서둘러 가버렸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의 명함을 후드티 호주머니에 찔러 넣고 아까 가던 길을 따라 계속 걸었다. 그녀의 그림자가 전보다 길어졌고 조금씩 어두워졌다. 드디어 그와의 데이트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 그녀는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일곱 시가 다 되어서, 그가 집에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하얀 비닐봉지가 대롱대롱 들려 있었다. 멀리서부터 맛있는 기름냄새가 풍겼다.
"왔어요? "
"네에, 오는 길에 통닭 한 마리 튀겨 왔어요."
그는 하루 종일 일하고 돌아온 사람답지 않게 에너지가 넘쳤다. 그가 거실 바닥에 비닐봉지를 내려놓고 잠시 안방으로 사라졌고, 그녀는 냉장고에서 시원한 맥주를 꺼내왔다.
"영화관에 누워서 커다란 스크린으로 팝콘이랑 콜라 먹으면서 봐야 하는데."
어느새 거실로 돌아온 그가 티브이 리모컨을 누르며 말했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티브이 화면을 응시했다. 고물티브이로 집에서 영화도 볼 수 있다니. 그녀는 이 신기한 광경을 바라보며 맥주캔 뚜껑을 따서 그에게 건넸다. 드디어 그렇게 기다리던 영화가 시작됐다.
'청춘의 덫'. 영화는 서로 얽힌 젊은 네 남녀의 삶에 대한 기록이었다. 서로 너무 다른 정체성을 가진 네 사람이 자신의 삶을 지켜내기 위해 때로는 전장의 장수처럼 치열하게 싸우고, 때로는 옛시의 나그네처럼 구름에 달 가듯이 그렇게 흘러갔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지극히 사랑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듯이, 상대방을 역시 있는 그대로 사랑했다. 현실에서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은 라인이 그려지자, 그와 그녀는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파충류 같은 청수랑 유니콘 같은 백선이랑 이어지다니."
"쌈바 같은 주희랑 선비 같은 현서는 어떻구요. 흐흐흐."
"정말, 전혀 다른 사람들끼리 끌리는 걸까요?"
"자기가 갖고 있지 않은 게, 훨씬 탐스러워 보일 수도 있겠죠."
"서로 상호보완적이고...... 꽤 어울리는 조합인지도."
"보통 끼리끼리 어울린다고들 하던데, 놀라운 구석이 있네요. 극과 극이 만나면..... 도대체 어떻게 살까? 그림이 그려져요?"
"글쎄, 사람 나름 아닐까?"
그들은 바삭한 통닭을 뜯고 기름 묻은 손으로 맥주를 홀짝이며 영화를 보았다.
"다시 돌아와 줄래? 너에게 꼭 하고 싶은 말, 하지만 들을 수 없는 말. 가슴 깊이 새겨진 너, 다시는 볼 수 없는 너. 그래서 난 슬퍼져. 내 곁에 있어줘. 아무 말하지 않아도 좋아. 날 혼자 두지 말아 줘. 자꾸 눈물이 날 것 같아."
주인공들이 헤어지고 서로 기다리고 엇갈리는 부분에서 그녀가 좋아하는 그 노래가 흘러나왔다. 두 사람 모두 나지막이 후렴 부분을 따라 불렀다.
"왜 서로 사랑하면서 저렇게 헤어져야만 하는 건지. 참, 애꿎은 인연. 그래서 감독이 '청춘의 덫'이라고 했나 봐요."
"그러니까요. 각자 저런 사연 하나쯤 품고 살지 않나요?"
"오우, 그 사연 언제 들어봅시다."
"뭐, 언제가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두 사람에게도 분명 저런 가슴 시린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뭐든지 꿈꿀 수 있고, 뭐든지 부딪혀 보고,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절망도 하고, 그러다 툭툭 털고 일어서던 날들. 우리가 감히 청춘이라고 이름 부르던 날들. 그리고 무엇보다 두려움 없이 서로 사랑할 수 있었던 그날들에 대하여 건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령 그것이 지독한 덫이라고 해도.
"우리의 청춘을 위하여, 건배!"
"우리의 진정한 해방을 위하여, 건배!"
그는 청춘을 위하여, 그녀는 해방을 위하여 맥주캔을 높이 들었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 둘 다 조금은 흥분되어 있었다. 영영 다시 돌아오지 않을 젊은 날,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소중한 남은 날. 이제는 빈 도화지에 어떤 색을 칠해야 좋을까. 그는 무미건조한 일상에서 벗어나 조금은 더 특별한 하루를 만들어 가고 싶다. 그녀는 틀에 박힌 공식들을 벗어나 좀 더 자유롭게 살고 싶다. 다른 사람들의 부정적인 시선 따위 벗어던지고 푸른 바다를 유유히 헤엄치고 싶다. 정말로 해방되고 싶다. 우린 행복하고 싶다.
"그거 알아요? 저, 지훈 씨가 무슨 일 하는지 알아요."
"어떤 일 하는데요?"
"뇌 연구하죠? 저의 뇌는 어때요?"
"어떻게...... 알았어요? 비밀인데."
"비밀이 뭐 그리 허술해요? 크크크."
"미안해요. 그런데 알고 있으면서 왜 도망 안 가요?"
"딱히.... 갈 데가 없어요. 여기가 제일 안전해 보이구요."
"안전이라..... 흠."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곳이 의외로 안전하겠더라구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생각보다 똑똑하네요."
"의외죠? 난 살아남을 거예요."
"암요, 그래야 해요. 제가 도울게요."
"그걸 어떻게 믿어요?"
"한번 믿어봐요. 어쨌든 반반이잖아요."
"흥, 싫어요. 믿을 만한 증거를 보여줘요."
그러자 그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거실 천장에 달린 둥근 화재경보기를 등지고 서서 그녀에게 모기만 한 목소리로 말했다.
"텔레파시, 빙고."
그녀는 그의 말을 듣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가 생각했던 모든 것이 사실이라는 증거가 바로 눈앞에 있다. 그녀가 사랑하게 된,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게 된 그가 있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함께 쫓기게 되었다. 아니 세상으로부터 도망자의 낙인이 찍히더라도 함께 해방을 꿈꾸기로. 그게 그들에게는 행복이니까. 창 밖은 가을바람에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까마득한 봄날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