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싸움

에피소드 16

by 진화정


패싸움

(에피소드 16)


초등학교 시절을 통틀어서 나는 싸운 적이 거의 없는데, 어쩌다 보니 싸움에 휘말린 적이 한 번 있다. 당시 여자아이들의 성장 발육이 남달랐고, 남자아이들은 고만고만했는데, 은근히 서로에 대한 적개심이 싹트고 있었나 보다. 어느 날,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학교 뒷산에 모두 모였다. 왜 하필 뒷산에서 모이는지 영문도 모른 채, 나는 아이들을 따라갔다. 나를 포함해서 여자아이들이 일곱 명 정도, 그리고 남자아이들도 일곱 명 정도가 올라왔다. 마치 써니 같은 영화를 찍고 있는 것처럼 여자아이들이 왼쪽에 일렬로 섰고, 남자아이들이 오른쪽에 일렬로 마주 섰다. 그 와중에 나는 왼쪽에 어중간하게 서있었는데, 사실 그 아이들이 주고받은 이야기조차 제대로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만 그때 그곳의 분위기는 별로 좋지 않았고, 어쩌다 보니 남자아이가 던진 축구공이 내 머리로 떨어져서 몹시 아팠다.



공중으로 튀어 오른 축구공이 신호탄이라도 되는 듯이 아이들은 뒤죽박죽이 되었다. 아무리 몸집이 큰 여자아이들이라고 해도, 남자아이들을 당해낼 재간은 없다고 판단했는지, 여자아이들은 일제히 학교 쪽으로 몸을 돌려 달아났다. 남자아이들은 먹잇감을 노리는 사냥개들처럼 뿔뿔이 달아나는 여자아이들을 뒤쫓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 건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나에게는 대단한 내용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곳에 있었고, 여자아이었고, 함께 쫓기고 있었다. 우리는 학교로 내려와서 반들반들한 복도를 뛰어서 숨을 곳을 찾다가, 여자 화장실에 숨었다. 각자 한 칸씩 들어가서 문을 걸어 잠그고 숨을 죽였다. 다른 여자아이들이 이게 무슨 상황이냐며 궁금해했고, 대충 설명을 듣고는 남자아이들이 오는지 우리 대신 망을 봐주기도 했다. 한참을 화장실에 숨어 있다가, 각자 가방을 챙겨서 학교를 빠져나왔다.



그러나 이제부터 본격적인 숨바꼭질의 시작이었다. 남자아이들이 우리를 여전히 추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멀리 달아날 엄두를 내지 못하고, 학교 근처의 오래된 민가에 숨어들었다. 서로 좁은 틈에 몸을 숨기고 다시 숨을 죽이고 있었다. 꽤 시간이 흘렀는지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주위는 조금씩 어두워졌다. 우리는 이만하면 갔겠지 하고, 틈바구니에서 나와 서로를 살폈다. 이제 집으로 가야지 하고 걸어가는 도중에, 우리는 기어코 남자아이들과 다시 부딪혔다. 왠지 모르게 끓어오르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그 시간까지 여자아이들을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서로 날카로운 말들이 오가고 분위기가 더 안 좋아질 수도 있었는데, 문득 우리가 왜 싸워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대화로 이어졌고, 어쩌다 보니 여자아이들과 남자아이들은 그렇게 서로 말을 섞고 있었다. 길가에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다는 누군가 말에 동의한 아이들은 그 근처에 있던 아이의 집에 들어갔고, 우리는 거기서 나름 화해를 했다.



재밌었던 건, 그렇게 싸우던 여자아이들과 남자아이들은 서로 마음에 둔 아이가 하나씩 있었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우리는 누구를 마음에 두고 있는지 한 명씩 스무고개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모두 호기심으로 가득했던 그 시간, 나 역시 이런 흥미진진한 상황이 싫지는 않았지만, 어두워지는 창 밖을 보며 혼자 마음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집에 너무 늦게 가면 아버지께 혼이 날 각오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통 집에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에게 관심을 보이던 남자아이도 있었지만, 혼자 안절부절못하다가 다행히 집에 들어간 기억이 난다. 그때 우리는 도대체 왜 싸웠을까? 기억나지도 않을 만큼 대단하지 않은 이유로, 우리는 왜 그렇게 숨어야만 했던 것일까? 과연 아이들은 사랑의 감정이 무엇인지 알긴 했을까? 누군가에 대한 알 수 없는 미움이 어쩌면 은근한 관심과 사랑에 근거했던 감정은 아니었을까? 그때의 아이들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수,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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