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묘한 실험

에피소드 14

by 진화정


미묘한 실험

(에피소드 14)


겨울 아침, 어머니는 전축에 카세트테이프를 넣고 플레이 버튼을 누르신다. 아직도 잠에 취해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내 귓가에 크리스마스 캐럴이 들려온다. 신나는 멜로디를 따라 잠도 서서히 달아나고 어머니는 내가 뒤집어쓴 이불을 걷어버리고 창문을 살짝 열어 놓으신다. 그 틈으로 차디찬 겨울바람이 밀고 들어와 캐럴과 함께 내 방을 떠돈다. 나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눈을 비비며 일어나 방바닥에 앉는다.


"몇 시인데요?"

"시계 봐."

"이제 겨우 일곱 시요."

"겨우라니, 아침밥 먹어야지."


그랬다. 우리 가족은 아침 일곱 시가 되면 함께 모여서 아침식사를 했다. 이것은 비단 아침만 해당되지 않았다. 점심은 열두 시에, 저녁은 여섯 시에 어김없이 모두 모여서 함께 먹었다. 군인가족 아니랄까 봐, 늘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으로 먹고 자고 일어났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아침식사 준비를 하느라 바쁘셨고, 아버지는 티브이로 스포츠나 바둑을 보고 계셨다. 남동생은 방 여기저기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잠덧을 했고, 나는 반쯤 잠이 깼는데도 일어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아침을 제시간에 먹었고, 점심식사를 하기 전까지 각자의 시간을 가졌다. 장난감이나 즐길 거리가 별로 없어 뭘 할까 고민하던 내게 아버지께서 계획표라도 작성해서 주어진 시간을 알차게 보내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방바닥에 종이 한 장을 놓고 동그라미를 그려놓은 후, 생각을 해보았다. 다행히 아침식사, 점심식사, 저녁식사 시간은 채울 수 있었다. 이제 그 사이사이에 무엇을 할지 정하면 된다. 이 추운 겨울에 밖에 나가서 노는 것도 한계가 있기에, 나는 어머니께서 어디선가 얻어오신 위인전이나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낡고 오래되고 손때가 묻은 위인전이지만, 그 내용은 어린 나에게 영롱한 울림을 주기에 충분했다.


점심식사를 하고 이제 오후에는 무엇을 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약속이 있으신지 어머니와 아버지는 잠시 외출을 하셨고, 나와 동생은 심심하니까 그동안 모아둔 구슬이나 딱지를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부모님 방에 놓인 전축이 생각났다. 전축 맨 위엔 턴테이블이 있었고, 그 아래로 카세트 오디오가 있었고, 맨 아래엔 LP 레코드판이나 카세트테이프 등을 넣어둘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유리로 된 여닫이문을 살짝 눌러 열어서 아버지가 모아놓으신 레코드판을 살펴보았다. 내가 잘 모르는 노래들이었는데, 너무 궁금했다.


나는 종이로 된 케이스에서 LP판을 꺼냈다. 그러나 이걸 어떻게 들을 수 있는지 몰랐다. 전축을 이리저리 쳐다보다가, 맨 위에 있는 투명한 플라스틱 뚜껑을 열어보았다. 동그란 턴테이블에 기다란 팔이 하나 달려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LP판을 턴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톤암을 대었다. 그러나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다. 두근두근 실험이 시작되었다. 전원을 켜고 이랬다 저랬다 하다 보니 노래가 흘러나왔다. 1980년대 가요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LP판을 타고 흘러나왔다. 나는 다른 LP판도 꺼냈는데, 거기서는 목소리 없는 경음악이 흘러나왔다. 남동생과 나는 두근거림과 신기함과 즐거움을 만끽하며 아버지의 보물창고를 마음껏 털었다. 한참 전축이랑 놀다가 우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정리해 놓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며칠 후, 나는 내 방에서 놀다가 아버지의 당황한 목소리를 들었다. 전축이 이상하다는 내용이었는데, 나는 선 듯 나서지 못하고 혼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내 방문이 벌컥 열렸고, 아버지께서 내게 물었다.


"네가 전축 만졌니?"


나는 놀라서 한동안 눈만 끔뻑거리다가 어버버 대면서 둘러대기 시작했다.


"그게요, 그러니까, 그냥 궁금해서요, 어쩌다 보니까....."


아버지는 아끼는 전축이 망가져서 굉장히 화가 많이 나셨지만, 회초리를 들지는 않으셨다. 나는 죄송스러운 마음에 어쩔 줄을 몰랐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아버지께 다가가서 제 잘못이라고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허락도 없이 전축을 만졌다고 나에게 '이놈' 하시긴 하셨지만, 그뿐이었다. 죄송하고 감사하고 미묘한 마음이 교차되는 순간이었다.

수,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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