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캡슐

에피소드 15

by 진화정


타임캡슐

(에피소드 15)


나는 어릴 때부터 친한 친구가 별로 없었다. 워낙 자주 이사를 다니기도 했지만, 딱히 붙임성이 좋은 편도 아니었다. 밝고 꾸밈없고 털털한 성격이었지만, 다소 내성적이어서 낯가림도 있었다. 같은 관사 A동에 사는 키가 큰 여자친구와 친하게 지냈는데, 부모님들끼리도 서로 잘 아는 사이었다. 그 친구는 공부도 잘했지만, 그림에 정말 소질이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친구의 어머니께서 예술적 소양이 있으셔서 그런지, 그 친구와 친구의 남동생까지도 그림을 제법 잘 그렸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선과 면으로, 그리고 색깔로 멋지게 표현할 줄 알았다. 나는 그 친구와 어울리는 것이 정말 즐거웠다.


우리는 함께 만나서 인형놀이를 했다. 당시 문구점에서 종이인형 키트를 팔았지만, 우리는 직접 그리고, 색칠하고, 오리고, 붙여가며 인형을 만들고 놀았다. 친구가 수영복을 입은 예쁜 공주를 그리면, 나는 색칠하거나 오리는 작업을 했다. 그리고 공주의 바디라인을 따라 다양한 옷과 모자, 가방, 액세서리 등을 만들었다. 한창 티브이에서 '베르사유의 장미'라는 만화가 방영되던 시기, 우리는 풍성한 드레스도 만들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오스칼, 그들의 파란만장한 이야기에 흠뻑 빠져있던 우리는 그렇게 완성된 인형 키트를 가지고 나름의 스토리를 만들어 놀았다.


그 친구는 특이하게도 거북이를 기르고 있었는데, 초록색의 작고 귀여운 그 거북이는 투명한 수족관 안에서 느릿 나릿 걸어 다니곤 했다. 촉촉해 보이는 작고 까만 눈을 꿈뻑꿈뻑 거리기도 하고, 귀여운 발가락을 요리조리 움직이기도 했다. 수족관 가운데에 놓인 넓적한 바위에 올라가서 꿈쩍도 하지 않고 있을 때도 있었다. 친구가 거북이를 꺼내서 나에게 등껍질을 만져보라고 건네줬다. 생각보다 딱딱하지 않고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장난기가 발동한 친구는 거북이의 등껍질을 바닥으로 향하게 놓았고, 거북이는 천장을 바라보며 바둥거렸지만, 혼자 몸을 뒤집어 일어날 수는 없었다. 당시 티브이에서는 거북이 특공대 만화가 방영되었는데, 닌자 거북이들 눈에 두른 띠 색깔로 캐릭터를 구별했다. 유난히 피자를 좋아하던 거북이들...... 레오나르도, 도나텔로, 라파엘, 미켈란젤로.


어느 날 친구는 뜬금없이 나에게 혈서를 쓰자고 했다. '우리 우정 변치 말자'는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우리는 그것을 위해 진짜 손에 피를 흘렸다. 그것을 이것저것으로 꽁꽁 싸매서, 마치 타임캡슐 마냥 어딘가 파묻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 함께 열어보기로 했었다. 그곳이 대충 어디쯤인지 나는 아직도 기억이 나긴 하지만, 지금도 없어지지 않고 거기에 잘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 그 친구는 캐나다에서 결혼해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연락해 본 지 너무 오래되었다. 몇 번의 계절이 바뀌면 친구네 거북이는 허물을 벗었다. 나는 거북이가 등껍질 모양 그대로 하늘하늘 벗어놓은 그 허물을 신기하게 바라보곤 했었는데, 시간은 이렇게나 꽤 흘렀다. 그 사이 우리도 거북이처럼 조금씩 성장했다. 오늘따라 왠지 그립다.

수,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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