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이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 된 시대
요즘 콘텐츠를 보다 보면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방식이
점점 비슷해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사람을 화나게 하거나,
불안을 자극하거나,
한계를 밀어붙여 반응이 무너지는 순간을 끌어낸다.
그 장면을 잘라 재미로 소비한다.
내가 더 불편하게 느끼는 지점은
그 자극이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많은 콘텐츠는
사람들이 어디에서 불안해하는지를 먼저 관찰한다.
그리고 그 불안을
개인의 결핍으로 명확하게 이름 붙인다.
지금 부족한 것,
지금 뒤처진 것,
지금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느껴지는 지점들.
이후에 이어지는 것은
공감이라기보다 계산에 가깝다.
“이 불안이 먹히는구나. “
”이 결핍은 사람들이 반응하는구나. “
그러면 이 지점에
해결책이라는 이름의 상품을 붙인다.
클래스, 강의, 프로그램.
겉으로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결핍을 끝내는 구조가 아니다.
불안을 정리하기보다
관리하며 유지하는 방식에 가깝다.
불안을 발견하고,
그 불안을 개인의 결핍으로 고정한 뒤,
해결을 명목으로 사업 수단으로 만드는 구조.
그 안에서 사람은
계속 배우고,
계속 따라가고,
계속 아직 부족하다고 느낀다.
이 방식은
효율적인 비즈니스일 수는 있다.
시장 논리 안에서는
충분히 성공적인 전략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돈이
선뜻 가치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나는 이 구조가
사람을 자립시키기보다
의존하게 만드는 방식이라고 느낀다.
설계란 원래
사람을 붙잡아두는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설 수 있도록 돕는 구조여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요즘은 머무름보다
즉각적인 반응과 불안이
더 빠른 성과를 낸다.
다만 이 선택이
개인의 취향 차이로만 설명되기에는
요즘 사회의 방향이 조금 걱정스럽다.
불안을 자극하는 방식이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 되고,
그 효율이 반복될수록
윤리는 고려 대상에서
자연스럽게 밀려난다.
누군가가 틀렸다고 단정하기보다,
비윤리를 굳이 문제 삼지 않아도
아무 불편 없이 굴러가는 구조가
점점 당연해지고 있다는 느낌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이 흐름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내가 설 수 있는 기준을 분명히 하는 쪽을 택한다.
이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