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블코인은 화폐가 아니다

image.png


2007년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처음 공개했을 때, 세상은 빠르게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전화와 문자, 그리고 작은 화면에서 간단한 게임만 가능하던 휴대전화는 몇 년 사이 손안의 컴퓨터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SNS로 다른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고성능 게임을 즐기고, 고화질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심지어 문서 작업까지 스마트폰으로 처리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우리가 경험한 변화의 상당 부분은 이 작은 기기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한 가지를 상상해 보겠습니다. 이렇게 많은 기능이 추가되었지만, 정작 스마트폰에서 전화 기능이 사라진다면 어떨까요? 아무리 다양한 앱과 혁신적인 서비스가 탑재되어 있어도, 가장 기본적인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여전히 전화기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스테이블코인을 연구하는 경제학자로서 요즘 비슷한 생각을 자주 합니다. 스테이블코인이 DeFi 생태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AI 시대의 핵심 인프라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쏟아집니다. 디지털 달러, 글로벌 결제 혁신, 탈중앙화 금융의 기반이라는 수식어도 빠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작 스테이블코인으로 편의점에서 빵을 사고, 카페에서 커피를 결제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스테이블코인은 본래 안정적인 디지털 화폐로 등장했습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이 대규모로 통화를 공급하자, 기존 화폐 시스템에 대한 불신 속에서 비트코인이라는 사적 화폐가 탄생했습니다. 하지만 비트코인은 가격 변동성이 지나치게 컸고, 가치 저장 수단으로는 주목받았지만 일상적인 교환 수단으로 기능하기에는 한계가 분명했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스테이블코인이 등장했습니다. 가격을 달러에 고정함으로써 ‘화폐로서 쓸 수 있는 코인’을 만들겠다는 시도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스테이블코인의 모습은 조금 다릅니다. 일상 결제 수단이라기보다는, 가상화폐 거래소와 디파이 생태계 안에서 빠르게 회전하는 담보 자산에 더 가깝습니다. 사람들은 커피를 사기 위해 스테이블코인을 쓰기보다는, 레버리지를 일으키거나 유동성을 공급하는 데 사용합니다. 과연 스테이블코인은 스마트폰에서 전화 기능이 사라진 것처럼, 본래의 역할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저는 기술 전문가는 아니지만, 이 분야를 연구하면서 들은 이야기들을 종합해 보면 기술적 제약도 분명 존재합니다. 스테이블코인이 작동하는 블록체인 네트워크는 아직 완전히 성숙한 결제 인프라라고 보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비자나 마스터카드 같은 기존 카드 네트워크는 초당 수천 건 이상의 거래를 안정적으로 처리할 수 있습니다. 반면 많은 블록체인 네트워크는 초당 처리 가능한 거래 수, 즉 transaction per second가 그에 크게 못 미칩니다. 이론적으로는 빠른 네트워크도 존재하지만, 네트워크가 혼잡해지면 수수료가 급등하거나 승인 시간이 지연되는 일이 반복됩니다. 편의점에서 스테이블코인으로 빵을 결제한 뒤, 몇 초가 아니라 몇 분씩 승인 결과를 기다려야 한다면 일상적인 결제 수단으로 자리 잡기는 어렵습니다. 화폐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신속성과 확실성인데, 아직은 기존 카드 결제 시스템만큼 매끄럽게 작동한다고 말하기는 힘든 상황입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디지털자산기본법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스테이블코인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정책 당국과 업계에서는 스테이블코인을 AI 시대 금융 혁신의 핵심 인프라 중 하나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국경을 넘는 결제, 스마트 계약과의 연동, 디지털 경제에서의 실시간 정산 등 장밋빛 전망도 쏟아집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질문도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그렇게 중요한 인프라라면, 실제로는 어디까지 기술적으로 준비되어 있는지 보여줄 필요는 없는 것일까요. AI와 블록체인, 디지털 화폐라는 단어는 화려하지만, 정작 일상적인 결제나 대규모 상업 거래에서 기존 시스템보다 분명히 더 빠르고 더 싸고 더 안정적이라는 것을 체감하게 해주는 사례는 아직 많지 않습니다. 스테이블코인이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화폐가 되겠다면, 비자나 마스터카드와 같은 기존 결제망과 정면으로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속도와 안정성, 사용자 경험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기술적 완성도와 제도적 기반이 함께 갖춰질 때 비로소 새로운 화폐라는 말도 설득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스테이블코인이 과연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화폐가 될 수 있을지는, 화려한 수식어나 기대감이 아니라 실제 사용성과 신뢰에서 판가름 날 것입니다. 금융시장의 담보 자산으로서만 기능하는 코인이라면, 그것은 혁신적인 결제 수단이 아니라 또 하나의 금융상품에 불과합니다.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쓰이고, 기존 결제 시스템과 비교해도 경쟁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새로운 화폐라는 이름은 아직 이르다고 봅니다. 기술과 제도가 모두 준비되었을 때 비로소 스테이블코인은 화폐로서의 본래 기능을 증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작가의 이전글스테이블코인은 어떻게 금리에 영향을 미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