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을 마주하는 사람들

by 졔리

소멸을 마주하는 사람들


한때는 할머니가 영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끝이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러한 인지를 견지한 상태로 계속 지속될 줄 알았다. 이것은 어떠한 순수나 부정의 형태를 띠고 있지는 않았다. 그저 자연스러운 형태로, 그렇지 않을까 스스로 정의 내렸었다.



12월 중순, 나에겐 지표를 엑셀로 정리하는 업무가 주어졌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양이 많아서 첫 야근을 했었다.



“퇴근 안 해요?”



“얼마 안 남아서 이것만 끝내고 가려고요!”



항상 첫 번째로 퇴근하던 나였다. 그런 내가 내가 사무실에서 3분의 2가 사라질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게 낯설었던 건지 놀라운 어투로 물었다. 내부망과 외부망을 수십 번 오가며 드디어 마지막 빈칸까지 채워졌을 때는 이미 사위가 어두워져있었다. 파일이 날아가는 사태를 이미 몇 번 겪어온 나는 그러한 상황이 트라우마로 남아 은연중에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었기에 저장 버튼을 몇 번이나 클릭해댄 후에야 마무리할 수 있었다. 8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일반적인 퇴근 시간을 넘긴 지하철 내부는 낯설 정도로 한산했다. 야근으로 몸은 피곤했지만 집에 도착할 때까지 편히 갈 수 있다는 점은 마음에 들었다. 10분쯤 지나,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아빠였다. 그냥, 언제 오냐는 질문이 날아올 줄 알았기에 대수롭지 않게 수락했지만 아빠가 덤덤하게 던진 말은 ‘할머니가 돌아가셨어.’였다. 평소의 질문보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말은 무게가 있었다. 갑작스러웠지만 또 갑작스럽지 만은 않았다. 얼마 전부터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말과 얼마 남지 않으셨단 말은 들었기 때문에 충격받을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나는 할머니가 다시 우리 집으로 돌아와 나와 함께 할 시간 정도는 존재할 거라 굳게 믿어 타격이 컸다. 사실 모든 죽음은 갑작스럽다. 얼마 남지 않은 시한부라는 통보를 받았다 하더라도 시한폭탄처럼 내가 눈 감게 될 날이 오차 없이 표시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제 나와 대화를 나눴는데 갑자기, 어제 나를 안아줬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한 통보를 받고 그저 멍해졌다. 아니, 조금은 초조했을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에 지하철에서 이러한 상황을 마주한 사람을 보았다.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받고 누군가 돌아가셨단 말을 전해 듣고 그 사람은 울었다. 지하철 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람에게 안타까운 눈빛을 보낼 정도로 펑펑. 하지만 나의 경우 눈물은 나지 않았다. 다만 무슨 정신으로 장례식장에 갔었던 건지는 모르겠다.







“급하게 왔어?”



아빠는 집에 들렀다오라는 말을 전했지만 난 바로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고모가 나를 반겨주었다. 돌아가신지 몇 시간도 안 되는 시점이었기에 아직 준비된 것이 없었고 한산했는데 동시에 조금 어수선하기도 했다. 나는 고모와 사촌 오빠, 그곳에 있는 사람들과 안부를 물었고 일상을 공유했다. 내가 발 딛고 선 곳이 장례식장이 아니었다면 아주 자연스럽고 단정한 한 장면이었을 테지만 그것은 적어도 당사자 입장에서 보통의 공간은 아니었다. 어른의 장례식장을 가본 것이 할아버지와 할머니. 총 두 번뿐이었기에 특정 감정이 올라와도 무시했으나 할아버지의 장례식에서 기묘함을 느꼈다. 그것은 어른들이 죽음을 대하는 방식이 너무 무덤덤하다는 것이다. 생명체의 죽음은 당연하지만 그저 일상적인 일 처리하듯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심지어는 편하게 그곳에 이르렀단 말을 내뱉는 게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할아버지의 돌아가신 해에 나의 나이는 14살이었기에 어른이 되면 모두 인간을 하나의 소모품으로, 소멸됨을 당연하게 여기게 될까 봐 그것을 두려워했다. 할머니의 장례식은 할아버지의 장례식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당연히 분위기가 유쾌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슬픔이라는 것이 빠져있다는 게 여전히 못마땅했다. 어른들은 13년 전에 봐왔던 것과 같이 형식적으로 장례를 치렀다. 늦은 밤에 돌아가셨기에 첫날은 조문객을 맞을 일이 많지는 않았다. 장례식장 내부에 짧은 잠을 청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지만 나는 다음날 다시 오기로 하고 어른들만 남기로 했다.







나는 대외적으로 울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혼자 있는 시간에 많이 울곤 했다. 그날 밤도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할머니가 생활하던 공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할머니의 흔적은 식탁 아래에 생생하게 실재하고 있었다. 잡음이 심하다며 불평을 하시던 라디오, 발목 쪽이 뜯어져서 버리려 했지만 결국 할머니가 입게 된 수면바지, 고모가 사준 금박이 가방, 유난히 꽃을 좋아하던 할머니께 내가 선물했던 꽃까지. 나는 늘 조용히 울었다. 어릴 적부터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는 형태로 운다고 자주 핀잔을 듣곤 했는데 그래서 그날도 조용히 울 줄 알았다. 하지만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다가 결국 오열해버렸다. 그날 밤 내가 서 있는 자리는 늘 누워계시던 할머니와 대화하던 자리였는데 소소하고, 쓸데없는 말을 건네고 그러한 손녀딸을 어이없어하며 웃던 할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하지만 이제 할머니는 나의 회상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인지한 순간부터 밤새 눈물만 흘렸다. 14살의 어린 나는 어른이 되면 죽음을 당연 시 여길까 두려워했지만 그러한 우려와 달리 가슴 한쪽이 뻥 뚫린 듯한 상실감과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의 감정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렇기에 더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다들 나 같은 감정을 느끼지 않은 건지 어떻게 그렇게 형식적일 수 있는 건지 원망스러웠다. 한 번도 이러한 의문을 질문의 형태로 발화해 본 적이 없었다. 그에 대한 답이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니까.‘라는 모진 말일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침대에 눕고서도 계속 눈물이 흘러 베개가 축축해졌다. 그날은 아빠가 집에 오지 않아 다행이었다.





‘피자 먹고 싶어.’



아주 오래전의 내가 보였다. 양갈래로 머리를 땋은 작고 어린 내가. 그 시절의 나는 할머니와 매주 치과에 갔었다. 가기 싫은 마음에 옷장에도 숨어보고, 세탁기에도 숨어본 전적이 있었지만 할머니는 나를 어떻게든 찾아내셨다. 치과에서 치료받는 동안 울먹거리는 나를 괜찮다며 달래주곤 손을 꼭 잡아주셨다. 그런 후엔 시장에 가서 장을 보고 떡을 사서 나눠먹는 여유롭고도 평온한 일상을 보냈었다. 시장에서 오는 길엔 한판에 5,000원인 피자집이 있었는데 지나칠 때마다 고소한 치즈 냄새에 매료되었다. 어느 날은 그 피자가 너무 먹고 싶어 할머니에게 사달라고 졸랐었다. 피자집은 집에서 거리가 멀지는 않았지만 낮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돌아올 때는 오르막길을 오르는 게 불가피했다. 할머니는 다음에, 치과 진료를 끝내고 사주겠다고 얘기하셨지만 어린아이의 보챔을 그리 쉽게 잠재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잠시 낮잠을 자던 나를 깨운 건 어떤 고소한 냄새였다. 눈을 뜬 내 앞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피자가 상 한가운데에 놓여있었다. 한 조각 집어 든 손에는 끈적한 감각에 뜨거운 온기가 전해졌고 고소한 치즈의 향이 후각을 자극했다. 정신없이 먹어치우는 동안 할머니는 문가에 서서 그런 나를 지켜보고 계셨다.



‘맛있어?’



약간의 미소를 머금은 할머니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토핑이 듬성듬성한 것도 모자라 치즈도 발린 듯 만 듯 한 피자였지만 그 피자만큼 맛있는 피자는 없었다. 나를 지켜보는 할머니의 시선만큼이나 따뜻하고도 다정한 꿈이었다.









이튿날이었다. 아침 10시쯤 입관이 진행되고 본격적으로 조문객을 맞이할 거란 이야기를 들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눈송이가 가볍게 지면을 두드리기 시작했는데 이내 유례없는 폭설이 내렸다. 회색 아스팔트와 가장자리에 옹기종기 모인 차들에 새하얀 눈이 내려앉았고 장례식장 앞 인조 벚꽃나무에도 소복하게 쌓여있었다. 혹독한 추위가 기승을 부릴 계절이었지만 눈이 내린 탓에 온도가 높아져 조금은 온화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한 바깥 풍경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그저 그러한 감정을 느꼈지만 눈이 내리면 현실적인 문제가 하나 생긴다. 할머니와 나는 부산 사람이었기에 장례식에 오게 될 조문객도 거의 부산에 거주하는 분들인데 폭설로 인해 운행이 중단될까, 그것을 걱정해야 했다. 다행히도 조금 지연됨은 존재했지만 큰일은 생기지 않았다.



첫날 급하게 도착했을 때 느꼈던 텅 빈 공간의 어수선함은 잦아들었고 모든 게 빼곡하게 정돈된 상태였다. 테이블 위에 깔아둘 비닐, 워크인에 비치된 각종 음료와 술, 조문객을 위한 음식이 정갈하게 차려져있었다. 갓 끓인 육개장에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모든 게 단정했지만 장례식장은 맞춤형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덥고 답답한 특유의 온도가 존재했다. 그 때문인지 슬픔을 속에 담아둔 심리적인 요인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힘이 쭉 빠지고 기운이 없는 상태가 지속되었다. 그렇게 바쁘게 일상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장례식이라는 공간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인간의 죽음 앞에서는 가장 긴급한 일도, 중요한 일도, 가치 있는 일도 존재하지 않았다. 둘째 날부터 상복을 입게 되었는데 마냥 편하게 입을 옷은 아니었기에 조금 긴장이 되었다. 새까만 상복을 입고 하얀 핀을 꽂은 우리가 일렬로 서니 점점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우리도 밥 먹을까?”



조문객이 뜸해지고 한산하던 때에 고모가 물었다. 우습게도 장례식장이란 공간에서는 항상 허기가 졌다. 특정 음식이 먹고 싶다는 욕구나 배가 고프다는 욕구보다는 허기가 진다는 표현이 딱 맞았다. 따뜻한 밥과 뜨끈한 육개장의 국물, 보들보들한 계란찜의 감각들이 느껴지지 않았다. 채우면 채울수록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마냥 가라앉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아빠의 친한 동생이란 분은 분위기를 띄우려 적당한 유머를 섞어 에피소드를 끌어갔고 우리는 그에 점차 동화되었다. 나 역시도 이따끔씩 멍해지는 것만 빼면 크게 나쁘지 않은 상태였다.



“너도 좀 쉬어라.”



갑자기 날아든 고모의 말에 갖가지 화려하게 차려진 찬에는 손도 데지 않고 국만 떠먹던 아빠가 고개를 들었다.



“엄마가 선물을 준 거잖아. 너 쉬라고.”



모친상으로 고모와 아빠는 각각 5일씩 쉬게 되었다. 요즘 여유가 없던 두 분이었기에 문제가 될 대화는 아니었지만 그 순간 어쩐지 한기가 들었다.



아침 10시 10분 전, 예고대로 입관실에 들어섰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에선 어린 나를 배려해서 인지 입관실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했었다. 아마, 이 경험이 나의 생각을 조금 바꾸어 놓았던 것 같다. 입관실에서는 마지막으로 할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죽음을 겪은 인간의 모습은 생전의 모습과 다르리라 예측했지만 가끔 집에서 잠든 할머니를 내려다볼 때 그 모습과 일치했다. 다른 점을 찾으라면 코에 찔러둔 휴지 조각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할머니는 그냥 주무시고 계신 모습이었다. 입관실에 들어선 것이 이곳이 장례식장이 맞는다는 걸 깨닫게 된 최초의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죽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고 생각했던 어른들이 침통한 얼굴로 눈물을 흘렸다. 고모의 마지막 인사는 장례식에서 한 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나를 울게 했다.



“엄마, 꼭 다시 만나자.”



“엄마, 잘 가.”



맞다. 나에겐 할머니였지만 아빠와 고모에겐 엄마였다. 들끓을 준비를 하던 용암이 자극을 받아 그 순간 터진 것처럼 그 말이 나를 건드려 눈물을 흘렸다. 아빠의 친구분들은 고개를 숙이고 계셨던 것 같다. 할아버지의 장례식도 이랬던 걸까. 그때도 고모는 마지막 인사와 함께 눈물을 흘리며 할아버지를 보내셨던 걸까. 발인에서야 망자를 보내 주는 거라 생각했던 이전과는 달리 그 사람을 놓아주는 건 입관 때라는 걸 알게 되었다. 장례식장에서 우는 사람을 보는 건 발인 날뿐이었기에 착각했던 것이었다.



입관식에서 할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한 후 조문객을 맞이했다. 조문객이 뜸해지는 중간, 중간 나는 단상 위에 놓인 할머니의 영정을 하염없이 응시했다. 자주 입으시던 소라색 바탕의 꽃무늬가 장식된 블라우스를 입은 익숙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모습은 이제 사진 속에만 남아있었다. 장례식장 내부의 온도는 높은 편이었지만 내게 와닿는 온도는 서늘했고, 단상 위에 놓인 국화꽃의 향기가 정신을 어지럽혔다. 아직도 호칭이 명료하지 않지만 아빠의 친척 동생인 고모가 조문을 왔다. 직접 뵌 것보다 얘기로 들은 게 더 많은 분이셨지만 기억에 남는 이유는 할머니에게 인사를 드리기 전부터 울고 계셨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영정 앞에서 울던 고모는 전날 밤에 할머니의 흔적을 보며 울던 나와 겹쳐 보였다. 고모는 할머니의 동생, 그러니까 할아버지의 딸이셨는데 어릴 적 부모님이 바쁘셔서 우리 할머니 집에 자주 맡겨졌다고 하셨다. 나와는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았다는 게 공통점이었다. 그것 말고도 고모와 나의 상황이 비슷해서인지 나를 많이 이해해 주셨다. 회사 일이 너무 바빠서 반차를 내고 급히 오셨는데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도 회사 일을 생각해야 하는 자신이 너무 싫다는 말을 남겨주셨다. 그제야 서서히 명료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슬픔이 결여된 상태가 아닌 슬픔을 숨겨야 하는 상태였던 것이었다.



고모가 이해해 준 대로 할머니는 나에게 엄마였다. 나는 어릴 때 할머니와 둘이 살았다. 아빠와 고모는 그때 이미 경기도에 거주하고 있었고 부산에는 할머니와 나, 둘뿐이었다. 영도의 한 병원에서 태어난 나를 보러 가장 먼저 달려와주셨다고 한다. 어린이집을 다닐 땐 매일 머리를 예쁘게 땋아주셨고, 피자를 먹고 싶다는 손녀딸에게 당시 5,000원 하던 피자를 얼른 사 와주시기도 했다. 아프다고 낑낑댈 때면 잠도 못 주무시고 나를 돌봤고 어쩌다 식사를 거를 때면 나를 달래서라도 꼭 밥을 먹게 하셨다. 할머니를 떠나 경기도에 살게 되었을 때, 그리고 가끔 찾아뵐 때에도 내가 온다는 소식에 무릎이 좋지 않으심에도 오르막길을 올라가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사다 주셨다. 그전까지 건강하셨던 할머니가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었던 건 나와 버스 뒷자리에 앉아갈 때 사고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누가 말로 해준 것은 아니지만 그 기억이 남아있다. 어릴 적에도, 지금도 나에게 엄마가 없다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나에게 그만큼의 정성을 베풀어 준 것은 할머니뿐이었다. 할머니가 없었어도 나는 결국 어른이 되었겠지만 지금의 나에게 정서적으로 불안정함이 존재하지 않는 건 할머니가 베풀어 준 사랑 덕분이었다. 나는 고모와 아빠가 부럽다. 어떻게 할머니 같은 사람이 엄마인 복이 있을까 나는 가끔 생각한다. 그리고 안쓰럽다. 나보다 할머니와 함께한 시간이 두 배나 더 긴 그들의 슬픔이 더 클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한편으로는 내가 아직은 경제력과 안정성은 갖춘 어른이 되지 못했기에 할머니에게 무언갈 보답할 시간이 전무했음을 느낀다. 어느 날은 이것이 자괴감으로 날 찾아오기도 한다. 장례식이 있기 한 달 전은 친척 오빠의 결혼식이었다. 그날 식이 시작되기 전 오랜만에 할머니를 뵈러 요양 병원을 찾았지만 할머니는 코로나에 걸린 상태라 만날 수 없었다. 그 이후 통화를 했는데 할머니는 그때의 밥을 전혀 먹지 못하는 상태고 나와 이야기를 나눌 때 이따금 씩 숨을 헐떡이셨다. 코로나가 나은 후에도 기침이 자꾸 난다며 오지 못하게 했지만 그 말을 못 들은 척하고 가볼 걸 그랬다. 그게 마지막인 줄 알았다면 말이다.





해가 저물고도 꽤 지난 시점의 장례식장은 다시 고요해졌다. 저녁은 나가서 먹자는 얘기가 나왔고 우리는 늦은 시간까지 영업하는 막창집으로 향했다. 고모의 단골 식당이었던 모양인지 식당 주인은 반갑게 우리를 맞이했다. 하나같이 상복을 입은 우리의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고모가 건넨 짧은 말에 안타까운 표정으로 조의를 표했다. 식당 주인은 막창을 가져다주며 직접 올려주었다. 불에 올린 막창의 빛깔은 영롱했다. 서서히 막창의 기름 냄새가 공간을 퍼져나가며 식욕을 자극했다. 어느 정도 다 먹어갈 때쯤 식당 주인은 우리에게 다가와 봉투 하나를 건네주었다. 조의금이었다.



“뭘 이런 걸 줘.”



난감한 기색이 역력한 고모는 난처한 웃음을 지었지만 봉투를 조심스레 접어 앞주머니에 넣었다. 들어오던 시점에는 시끌벅적하던 이 공간에 어느새 우리만 남아있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마감 시간이 한참 지난 때였지만 우리가 갈 때까지 마무리하지 않고 기다려준 것이었다.



마지막 날은 빈소를 떠나 묘지를 가는 날이었다. 바로 옆에 있는 추모 공간 대신 시외의 추모 공간에 가기로 했다. 추모 공간으로 데려다주는 버스는 조명 하나 켜져 있지 않아서 낮인데도 불구하고 어둡고 음울했다. 전날 폭설의 여파인지 가는 길에는 드넓게 펼쳐진 산의 설경이 이어졌다. 추모 공간에 도착해서 내린 후, 버스에서 나오는 할머니의 온전한 육신은 그 순간이 마지막이었다. 그 자리의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할머니를 보내주었다.



잠시 추모 공간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정면만을 응시하다 잠시 고개를 돌렸는데 통창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은 환했다. 개개인의 비보를 헤아리지 못하는 자연은 청명한 하늘과 은은한 구름, 알알이 부서지는 햇빛까지 내보일 수 있는 아름다움을 모두 쏟아내고 있었다. 나무에 소복하게 쌓인 눈이 햇빛을 받아 눈이 시릴 만큼 빛이 났다.



유족이 대기하는 공간의 모니터에는 화장이 진행되는 시간이 표시되어 있었다. 화장이 끝나고 유골함을 받아들 때 고모는 입관할 때만큼이나 많은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 순간에 흘리지 못한 눈물을 장례식의 모든 절차가 끝나고 일주일이 지난 시점, 아무런 맥락도 없이 반찬 뚜껑을 닫을 때서야 흘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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