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입추(立秋)

- 나를 더 사랑하는 가을이 되길

by 노랑무늬영원

어제는 입추(立秋)였다. 말 그대로 여름이 지나 가을에 접어드는 시기이다. 이때부터 입동(立冬)까지를 가을이라 한다. 그런데 도대체 가을은 어디에 있는 걸까?


주말. 약속도 없고. 굳이 약속을 잡고 싶지 않을 날씨가 계속되는 요즘 난 가만히 있었다. 아무 것도 안 하지만 더욱더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 상태라고 할까. 누워서 뒹글뒹글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음악 듣고 잡생각에 빠져들고... 그렇게 시간을 뭉개고 있었다.


날씨가 하루 다르게 변하니 컨디션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무슨 티브이 광고처럼 문제는 ‘면역력’이 좌우하는 것 같은데, 밥 잡먹고 잘 싸고 그렇게 생활해야 하는데 요즘 도무지 밥도 잘 안 먹히고 그나마 어렵게 습관들인 운동도 흐지부지될까 두렵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등에서 땀이 ‘동 to the 그 to the 라미’ 형태로 아래로 서서히 흘러내려오는 그 기분은 여간 달갑지 않았다. 물론 샤워를 해도 그때뿐. 그리고 속으로 외쳤다. ‘아, 사무실이 제일 시원하구나!’ 그런데 이런 생각이 좀 민망하긴 하다.


요즘 이상하게 시간이 너무 빠르다.

나이가 들면 시간이 빠르게 느껴진다는데 그럼에도 체감시간이 더 빠르게 느껴지는 것 같다. 그냥저냥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이 다가오면 출근할 생각에 긴장하게 되고 막상 월요일, 화요일이 느릿느릿 하지만 동시에 압박감을 느끼며 지나간다면 수요일(사무실에서는 ‘정시퇴근의 날)은 아무 생각이 없이 스쳐가는 것 같고, 목요일은 ’주말권‘이라 다시 힘을 쥐어짜내어 버티는 시간이 돌아온다. 마지막 금요일은 조금만 참으면 주말이라고 스스로를 계속 다독이며 그 금요일을 실수 없이 보내려고 노력한다. 금요일 마지막 민원인을 응대하고 미지근한 물로 목을 축이면 신용회복자의 마지막 빚 탕감처럼 속이 참으로 상쾌해진다. 그러면 집으로 가는 발걸음은 절로 신이나 눈을 감고도 집에 갈 수 있을 지경이 된다.


가을? 넌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예전에 가을이 되면 조바심이 일었다. 봄에 세운 계획을 다시금 점검해 보고 포기할 건 포기하고 살릴 건 살려서 남은 1년을 보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가을을 느끼기에는 너무나 시간이 짧아 ’어~ 어~ 어!!‘ 이러다 가을은 나에게 내년에 만나자고 인사를 나눈다.

날이 지X같아도 이렇게 누워서 지내기는 주말이 너무 아까워서 도서관에 갔다. 신간코너에서 세 권을 골라 가방에 넣고 8월 28일까지 반납해달라는 직원의 말을 듣고 문을 나서려다 직원 책상 앞에 있는 코팅된 문구가 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우리는 감정노동자입니다'


속으로 나도 말했다. '그래요. 저도 감정노동자랍니다.'


집에 와서 책을 꺼내 읽으려고 책상 앞에 앉았다.

졸린다. 아, 내가 겨우 이런 수준밖에 안 됐나 싶어 페이지를 넘기는데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누구에게 자랑하고 싶어 책을 읽는 것도 아니고, 무슨 과제하려고 참고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독서왕에 도전하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의무감이 느껴지니 더 하기가 싫다.


마침 책상 위에 널부러진 동전이 보인다. 저녁에 가계부를 쓰면서 남아도는 동전을 얼른 분류해서 통장에 넣어야지 하면서도 몇 달간 뭉개고 있는 나를 바라본다. 그래, 오늘은 너야. 티끌모아 티끌이 될지언정 내가 한 달간 뼈 빠지게 고생해서 번 돈이 바로 너 아닌가. 그렇다면 내가 더욱 소중히 여겨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500원 짜리 1만 원, 100원 짜리 16,600원, 50원 짜리 1250원, 마지막으로 10원 짜리 980원.

총 28,830원이다.


남의 시간이 소중하면 내 시간도 소중하듯이, 남의 돈이 소중하면 내 돈 역시 소중하다. 점심으로 네 번은 어렵지만 세 번은 충분히 먹을 수 있는 내 땀이 담긴 큰돈이다. 올해도 그렇지만 매년 날마다 한 푼 한 푼 가계부를 쓰면서 그 소중함을 잃지 말아야겠다. 이 또한 나를 사랑하는 작지만 중요한 일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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