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지만 이건 재빠르지
사실 난 어렸을 때부터 행동이 굼떴다. 그리고 생각도 오래 하는 편이라 누군가는 신중하다고 칭찬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우유부단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 나는 느려터진 사람이면서 동시에 눈치도 별로 없다. 남이 원하는 바를 재빨리 캐치하는데 둔감한 사람이라 연애를 하면서도 상대방에게도 ‘답답하다’는 말을 들었었다. 그리고 남들이 낄낄낄 웃는데 나는 이해를 못해 우두커니 있다가 다른 사람이 잠잠해서야 박장대소 하는 뒷북치는 사람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무작정 느린 사람이냐 그건 또 아니다. 어떤 일에는 내가 아주 행동이 번개 같아 우사인 볼트 친척이라 여길 정도다. 그건 문화, 예술과 관련된 공연을 볼 때면 맨 앞자리를 차지하려고 발버둥을 쳤다. 대학교 축제 때 가수가 오면 맨 앞줄에 앉으려고 앞 수업은 통째로 날려먹고, 대학로에 연극을 보러 갈 때면 친구들이 편하게 뒤에 가서 보자는 말을 싹뚝 자르고(평소 내 말투가 아니라서 다들 놀라는 모습에 오히려 내가 당황한 기억이 있다) 맨 앞줄에 앉아 무대 조명이 꺼지길 기다렸고, 뮤지컬도 앞자리가 없어서 뒷자리만 남았다면 난 과감히 그 뒷자리를 포기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갔다.
지난 7월 6일부터 16일까지 ‘금천뮤지컬센터’에서 열린 ‘제1회 금천연극제’를 보러 갔었다. 금천구 홈페이지를 아무런 생각없이 서핑하다가 이런 커다란 보물을 발견한 나는 가슴이 매우 쿵쾅거렸다. 근 몇 년간 나는 문화적 욕구를 전혀 충족시키지 못하고 살았다. 누가 지우개로 지운 것 마냥 내 뇌에는 ‘문화와 예술 방면’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 것이다. 그런데 이 연극제가 오랜만에 내 가슴에 불을 질렀다. 게다가 시간도 평일 공연은 오후 7시 반부터 시작하기에 전혀 부담감이 없었다. 오랜만에 온 기회를 놓치기 싫었다.
공연은 총 4개로 극단 풍등의 ‘집주인’, 극단 노을의 ‘시장통 사람들’, 창작집단유희자의 ‘번아웃’, 금천연극협회의 ‘진실한 상담소’로 구성되었다.
업무가 끝나자마자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금천뮤지컬센터로 자리를 옮겼다. 평일 공연이 7시 30분이라면 입장은 7시 10분이라 앞자리에 앉고 싶은 마음에 조바심이 나서 저녁밥을 어떻게 먹었는지 지금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난 왜 문화 예술 공연에서 앞자리를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배우의 호흡을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배우가 내뱉는 대사 하나하나 그리고 동시에 취하는 행동 하나하나 내 눈에 담고 싶기 때문이다.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말, 행동, 춤, 동작, 침묵 등 모든 것이 살아 움직이는 그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다. 표정이 무척 단조로운 나로서는 어쩌면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공연하는 동안 내 표정은 평소와는 달리 각 배우의 감정을 동작을 모두 섀도잉하고 있을 거라 믿는다. 거기서 난 행복을 느끼는 것이고.
둘째, 2시간가량의 공연은 나에게 또 다른 삶의 표시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약 2시간 가량의 연극 또는 뮤지컬은 그 순간 우리에게 또 다른 삶을 살게 해주기 때문이다. 일상의 내 인생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삶 속에 풍덩 뛰어드는 그 순간의 희열을 난 설명할 수가 없다. 국어사전에 있는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배우가 대사를 내뱉으면 나 같으면 무슨 말을 할까 생각도 하고, 배우가 침묵을 지키면 그 마음속의 대사를 내가 만들어 보기도 한다. 어떤 동작을 취했을 때 나라면 이렇게 했으리라 생각도 한다. 그게 연출에 맞든 다르든 무슨 상관인가. 내가 이 순간을 즐기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니.
셋째, 배우가 노력한 땀방울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다.
맨 앞줄에 앉으면 조명 아래로 배우들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눈동자의 움직임, 입술의 흔들림, 미세한 잔근육의 떨림, 손을 움켜쥐고 펴는 일련의 행동, 상대 배우자를 향하는 눈짓과 몸짓 , 소품을 만지는 행동 등 이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보다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이분들의 이 공연을 위해 흘린 땀을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연극은 연출자가 의도하는 것을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태반이다. 하지만 각 순간순간무대가 암전이 되어 뒤로 물러나는 배우의 뒷모습에서 그리고 밝아지는 조명 앞으로 다가오는 다른 배우의 앞모습에서 난 그 소중한 땀의 흔적을 발견한다. 그리고 나도 그런 땀을 흘리겠다고 다짐한다.
공연이 끝났다. 배우들이 앞자리에 나와 고개를 숙이면 관객들은 아낌없이 박수를 보낸다. 이때 내가 하는 행동이 하나 있다. 각 배우의 얼굴을 눈으로 사진을 찍는 것이다. 그분들이 이때 나와 눈맞춤을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상관없다. 내 존경의 또 다른 표현이니 말이다.
이런 기회를 준 금천연극협회에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그리고 각 공연마다 뜨거운 열정과 차가운 이성을 골고루 보여준 배우님들에게도 다시 한 번 박수를 보낸다.
난 이번 기회에 적어도 올해부터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한 번 공연을 보러가자고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