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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윤수 Feb 06. 2023

드뷔시가 아직 리스트일 때

퇴근했으니 재즈 엘피 005

빌 에반스 트리오의 ‘데비를 위한 왈츠’

Bill Evans Trio - Waltz For Debby

2022년 아날로그 프로덕션(Analogue Productions) 45rpm 박스세트 M/M 기준


A면

My Foolish Heart

Waltz For Debby


B면

Detour Ahead


C면

My Romance


D면

Some Other Time

Milestones


앨범 이야기

그의 마지막 앨범 ‘봄을 믿어야 해요(You Must Believe In Spring)‘를 좋아한다. 할 거 다 해보고 겪지 않아도 될 것까지 다 겪어본 사람의 마지막 작품이라 그런지 잔가지가 없다. 눈 덮인 고목처럼 깊게 쳐 넓게 울리는 소리가 이어진다. 그 있는 듯 없는 듯한 연주를 들으며 해 지는 창가를 보고 있으면 나 역시 이렇게 저물었으면 좋겠단 생각이 떠오른다. 그 앨범에서 에반스는 불필요한 것들을 지워야 여운이 들어설 수 있음을 아는 사람이다. 중요한 것들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장치 말이다. 말년의 그는 군더더기 없이 할 말을 했고 공백을 많이 띄웠다. 나는 제법 나이를 먹은 뒤에야 얼핏 공백처럼 보이던 곳이 실상 꽉 차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거장의 반열의 오른 사람들이 말년에 낸 앨범들은 대체적인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니 수를 줄이며 빈도보단 강도에 집중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한 음 한 음 섬세히 다루며 천천히, 그리고 사근히 말을 건낸다. 들어줘서 고마워. 그런데 안 들어도 돼. 별 내용은 없어. 그래도 들을 만은 할 거야. 젊은이들은 생각이 많고 할 일도 많고 궁금한 것이 많아 나아가고픈 곳도 많기에 그들의 그런 말솜씨를 살피고 있을 겨를이 없다. 그래서 젊은이를 목적하는 요즘 음악은 3분 언저리의 시간 동안 들어찬 온갖 악기가 16비트로 춤춘다. 그래야만 더 많은 정보를 원하는 젊은이들의 시선을 잡아 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나름 오래 살며 분야는 다르더라도 그들에 견줄 만큼 삶 경험을 한 사람들(늙은이들)은 그들의 여린 말에 귀를 기울인다. 더 이상 궁금한 것도 없고 더 나아갈 체력도 없기에 가까이 다가와 쉬이 말하는 그들이 고마워 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그 속에 공백이 없었음을 발견한다. 이 사람 역시 할 말이 있었구나, 그저 방법이 달랐을 뿐. 이 사람은 말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었구나, 정말 중요한 건 말과 말 사이 생각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구나.


듣는 이가 활력과 체력을 주고 얻은 경험치를 충분히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화자가 그 경지에 이르는 말을 할 수 있으려면 충분한 과정이 필요하다. 비우기 위해선 일단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비워야 할지를 알기 위해선 차 있는 상태를 보고 문제의식을 가져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약간 담은 상태, 중간 즈음 찬 상태, 거의 다 찬 상태, 옆 통에 넣은 상태, 넣다 엎어서 잠시 포기한 상태 등 여러 단계와 상태가 선행되어야 한다. 처음부터 깨닫는 사람은 몇 없다. 인류의 위인들 중에도 내가 아는 건 석가세존 정도다. 그 외 결론에 다다른 대다수의 사람에겐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나아가는 시간들, 결론과는 다른 모습들이 있다. 에반스 역시 마찬가지다. 단편적 오해와 달리 그 역시 늘 변모했다. 며칠 정도 투자해 그의 음악들을 통시적으로 들어보면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이 사람도 젊었을 때가 있구나, 이 사람도 늙었구나, 이 사람도 사람이구나.


오늘날 그를 아는 사람들 중 대다수는 그가 지나간 이후 그를 알았다. 그래서 그의 인생을 한 자리에서 통시적으로 살필 수 있다. 그와 함께 호흡하며 그의 변화와 성장을 기대하고 채근하지 않아도 된다. 철 지난 드라마를 몰아보듯 이미 지나간 그를 관람할 수 있다. 나 역시 그랬다. 전기와 중기, 후기와 그의 잔향은 어찌 한 사람이 이리도 변화무쌍한지 놀라울 정도로 달랐다. 전기의 그는 마치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찾았다는 듯 신념을 담아 연주했고 중기의 그는 그 신념이 부서진 것 마냥, 하지만 따를 새로운 신념은 아직 못 찾은 것 마냥 새로운 시도와 방황을 반복했다. 후기의 그는 절대적인 덕이란 게 애초부터 없었다는 걸 알았는지 상황과 목적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며 연주했고 그의 잔향은 그런 추론이 무슨 의미가 있냐며 날 힐난하고 무의의 경지에 다다른 소리를 들려줬다. 내가 그의 변모를 느낄 수 있는 것은 멀리서 한꺼번에 그를 살폈기 때문이다. 불과 며칠 만에 그의 수십 년과 수백 번을 살폈고 그 압축적 시간으로 인해 대조는 더욱 커졌다. 실상 점진적인 인생의 변화는 급진적인 차이를 가진 결과물들로 읽혔다. 컴프레셔를 걸어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리게끔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그의 마지막 앨범을 좋아하는 내게 전기 그를 대표하는 작품인 이 앨범은 대단히 큰 콘트라스트와 함께 읽혀진다. 같은 흑백사진 안 하얀색과 검은색처럼, 같은 사람의 앨범이거늘 어찌 이리도 다른지 놀라울 정도. 결국 한 노트의 에코를 알게 될 젊은이가 아직 화려하고 날렵하게 건반을 두드린다. 결국 소리와 경험이 중요함을 알게 될 젊은이가 아직 리듬과 멜로디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결국 체념에 잠식될 젊은이가 아직 희망을 노래한다. 결국, 결국. 나는 스포일러를 미워하지 않는데 결말을 알고 시작을 보는 경험 역시 각별하기 때문이고 좋은 건 결말을 알아도 좋기 때문이다. 충분한 것은 그 속내를 알아도 가치가 닳지 않는다. 도자기나 클래식카처럼, ‘왈츠 포 데비’의 가치는 에반스가 어찌 될 것임을 알아도 닳지 않는다. 오히려 더 흥미진진하며 왜 이리 다른지 궁금해하며 그의 생각과 인생을 더 살펴보게끔 만드는 부가효과까지 얻는다.


리스트(Franz Liszt)든 드뷔시(Claude Debussy)든 ‘인상주의 음악가’란 틀에 묶이긴 하다만 그 둘의 취향은 전혀 다르다. 리스트는 선명하고 드뷔시는 섬세하다. 리스트는 “피아노가 이렇게 뛰어난 악기입니다. 피아노로는 못할 게 없죠.” 라고 말하는 것 같다. 드뷔시는 “피아노는… 뭐 사실 다른 것으로도 괜찮아요.” 라고 말하는 것 같다. 리스트와 드뷔시는 다르다. 그저 ‘인상주의’의 외연이 너무나 넓기에 둘이 한 틀에 묶이는 것이다. ‘데비를 위한 왈츠’와 ‘봄을 믿어야 해요’도 마찬가지다. 에반스란 틀이 너무도 넓기에, 그의 인생이란 길고 큰 틀 안에 있기에 두 앨범은 그리 다름에도 에반스의 앨범들이다. 


지난 명절에는 본가에 들러 어렸을 때 사진들을 봤다. 나 역시 지금과 많이 달랐다. 5살 때, 10살 무렵에, 학교 다닐 때, 서른 무렵. 그땐 지금보다 보기 좋았고 서툴었다. 많이 부족했고 활력적이었다. 그 이후는 디카와 폰카 때문에 인화한 사진이 없더라.


엘피 이야기

‘들을 수 있는 컨디션의’ 퍼스트는 프리미엄이 어마어마하다. VG+만 해도 수십만 원을 호가하고 NM은 돈 백이 우습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긴 한데 과열된 것 같기도 하여 쉬이 권하긴 어렵다. 수집이나 차익을 고려치 않는다면, 듣는 것을 목적한다면 다른 대안은 많다.


인기 있는 앨범이다보니 대체제는 많고, 그 중엔 나름의 독보적인 장점을 가진 에디션도 많다. OJC(Original Jazz Club)에서 여러 번 리이슈가 나왔고 2020년 에디션은 마블링 컬러라 두고 보기 좋다. 2012년 일본 ‘100% Pure Lp’ 시리즈로 나온 것은 래커 다음 바로 스탬퍼를 만드는 ‘원스텝’ 공정으로 만들어져 마스터테이프에 가까운 소리를 낸다. 아날로그 프로덕션은 33rpm 버전과 45rpm 버전 모두를 만들었는데 둘 다 리마스터링이 잘 되어 소리가 쏠쏠하다.


부틀렉(Bootleg, 미인가판)이 많으니 걸러 들어야 한다. 커버가 다르거나 비슷한데 리버사이드 로고가 없다면 부틀렉이다. 미인가판의 문제는 저작권준수를 논하기에 앞서 마스터테이프 없이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복제대상이 CD나 다른 엘피였을 터이니 음질이 멀쩡할 리가 없다. 사면 안 된다.


내가 갖고 있는 건 2022년에 나온 ‘리버사이드 레코딩스(Riverside Recordings)’ 박스세트다. 리버사이드 시절 앨범 열 장과 캐논볼 애들리(Cannonball Adderley) 앨범 중 에반스의 지분이 큰 앨범이 하나 들어있다. 그리고 45rpm이라 음질도 상당하다. 전기 에반스 음악을 쉽고 확실하게 살필 수 있는 수단이다.


같이 들어볼만한 앨범들

빌 에반스의 1981년작 ‘봄을 믿어야 해요’: 마지막 스튜디오 레코딩 앨범이다. 그가 결국 어디까지 나아갔고 그가 결국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느낄 수 있다. 특이사항이 있으니 이 앨범 엘피는 필히 ‘크래프트 레코딩스(Craft Recordings)’가 2022년에 내놓은 45rpm 에디션으로 들어야 한다. 퍼스트 에디션들의 음질이 신통치 못한 것에 반해 크래프트의 리이슈의 음질은 단연 빼어나며, 그 음질을 거쳐 들어야만 빌 에반스의 의도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나만 해도 리이슈를 듣고 나서야 앨범의 진정한 가치를 파악했고 “빌 에반스가 결국 하고 싶었던 말이 이것이었구나.”를 알았다.


빌 에반스와 짐 홀(Jim Hall)이 함께 한 1962년작 ‘언더커런트(Undercorrent)’: 홀은 좀 무서운 기타리스트인데 그 누구와 함께 해도 본인 앨범을 만드는 사람이다. 본인 앨범은 물론 심지어 남 앨범에서도 말이다. 기타를 좀 잘 치는 수준이 아니라서 리듬만 쳐도 무드가 생기는데 멜로디는 어느새 무드의 하수인이 되고 리더가 누구였건 앨범은 홀 앨범으로 거듭난다. 그런 홀에 잡아먹히지 않는 카운터파트를 볼 수 있는 몇 없는 경우 중 하나가 이 앨범이다. 여리고 잔잔한 곡들이건만 듣고 있으면 수마다 신중히 주고 받는 고수 둘의 싸움이 그려진다. 듀엣 앨범인데 홀도 있고 에반스도 있다.


빌 에반스 퀸텟의 1962년작 ‘인터플레이(Interplay)’: 언더커런트와 같은 해에 나온 앨범이거늘 둘은 스타일이 전혀 다르다. 언더커런트가 단 두 연주자의 좁고 깊은 연주를 핀 조명으로 비추고 살피는 미니멀한 앨범이라면, 인터플레이는 다섯 악기와 그것들이 화음을 내게끔 휘어잡는 에반스의 모습 전체를 전망하는 맥시멀한 앨범이다. 에반스 평소 스타일을 생각하면 대단히 화려하며 리버사이드 시절 앨범들 중 단연 이질적이다. “내가 안 해서 그렇지 하면 못 할 게 없지.” 라고 말하는 것 같다.


빌 에반스 트리오의 1966년작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Bill Evans Trio With Symphony Orchestra)’: 버브(Verve)에서 나온 몇 없는 에반스 참여 앨범이며, 프로듀서 크리드 테일러(Creed Taylor)와 함께 한 단 둘뿐인 앨범 중 하나고, 테일러와 함께 만든 유일의 리드 앨범이다. 다른 건 1964년에 녹음한 스탄 게츠(Stan Getz)와의 듀엣 앨범. 이 앨범은 단연 ’가장 안 에반스 앨범 같은‘ 에반스 앨범이니 ‘인터플레이’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다. 이는 테일러 때문이다. 테일러는 선명한 취향을 가졌고 그것을 일에 관철하는 사람이다. 온갖 연주자와 함께 진짜 어마어마하게 많은 앨범을 제작한 사람인데, 그가 제작한 앨범은 그 누구의 어떤 앨범이든 그의 취향이 진하게 묻어 있으며 이 앨범 역시 마찬가지다. 화려하고 복잡하며 드라마틱한 구성을 선호하는 테일러의 취향이 앨범에서 묻어난다. 문제는 에반스도 그런 사람인데 취향이 반대라는 것. 역시 선명한 취향을 가졌고 그것을 최소한 본인 이름 건 앨범에는 관철하는 사람이자, 단정하고 간결하며 섬세한 구성을 선호했다. 어찌어찌 하여 둘은 이 앨범에서 만나 놀라운 불협화음(이 역시 화음이다. 듣기 좋다)을 선보였고 이후 단 한 번도 다시 만난 적이 없다. 어지간히 안 맞았던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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