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아날로그 프로덕션(Analogue Productions) 45rpm 에디션 M/M 기준
A면
Quiet Nights Of Quiet Stars(Corcovado)
The Days Of Wine And Roses
My One And Only Love
B면
People
Have You Met Miss Jones?
C면
You Look Good To Me
The Girl From Ipanema
D면
D & E
Time And Again
Goodbye J.D.
앨범 이야기
예술가 치고 관대한 사람 몇 없다. 예술가는, 특히 현대예술가는 첨예하게 자아를 들이밀어 세상을 놀래켜야 하는데 관대해 이것저것 받아주다보면 보통 희석되어 첨예함을 잃어버리니까. 좀 괴팍하고 좀 배타적이며 좀 오만한 게 보통 예술가인데 그래야 뭔가가 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 직업병이겠거니 하기도 하여 그러려니 한다. 그런 와중 피터슨은 내가 아는 가장 관대한 예술가다. 예술가인데 관대할 수 있다니, 게다가 이토록 빛나는 커리어를 남길 수 있다니. 진짜 좀 놀라운 사람인데 50여 년을 활동하며 200장이 넘는 앨범을 냈고 1950~70년대를 빛낸 재즈 뮤지션들 중 대다수는 피터슨과 함께 한 곡, 혹은 앨범이 있다. 거진 한 해에 넉 장 꼴로 앨범을 냈을 정도로 다작했으니(게다가 50년 동안) 자신에게 충분히 관대했고, 그 많은 예술가(게다가 서로 지 잘난 맛에 사는)는 물론 그 많은 프로젝트들의 그 많은 조력자들과도 함께 했으니 남에게도 관대했다. 호인도 이런 호인이 없고 인싸도 이런 인싸가 없다.
그의 관대함은 이 앨범에서도 드러난다. 그 무렵 피터슨이 몸담던 재즈 레이블 ‘버브(Verve)’가 MGM(Metro-Goldwin-Mayer, 그 우는 사자 트레일러로 유명한 영화사)의 음반사업부에 인수되게 되었는데, 피터슨은 버브의 그간 역사를 기념하고 추억하는 겸 15년 넘게 일 같이 한 동지이자 돈 안 되는 재즈 해보겠다고 쌩고생하다 마침내 엑싯하는 노먼 그런츠(Norman Granz. 버브의 설립자이자 프로듀서)에게 축하하고 수고했다고 말하는 겸 하여 그간 버브에서 나온 히트곡들을 모아 연주하는 앨범을 냈다. 그래서 이 앨범은 오스카 피터슨의 앨범인 동시에 버브의 컴필레이션이며, 버브를 빛낸 뮤지션들을 향한 헌사이자 듣는 사람들에게 우리 시절의 버브를 추억해달라는 리메이크다. 이 얼마나 관대하며 이 얼마나 널리 아우르는가? 관객들 등지고 나팔 불던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라면 상상도 못할 컨셉트 아니겠는가?
중요한 시기에 나온 뜻 깊고 폭 넓은 앨범이라 그런지 그 만듦새가 예사롭지 않다. 워낙 다작을 한 양반이라 피터슨의 앨범들은 품질이 들쑥날쑥한데, 예컨대 1970년대 파블로(Pablo)에서 나온 앨범들 중 다수는 듣고 있으면 ”아 이 양반 그냥 관성적으로 치고 갔구만.“ 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품질이 들쑥한 것에 반해 이 앨범은 그의 디스코그라피 중 탑3 안에 들 수 있을 만큼 좋은 쪽으로 날쑥하다. 연주한 곡들이야 그때까지 버브의 히트곡들인 만큼 익숙하며 좋은 곡들이고, 레이 브라운(Ray Brown), 에드 티그펜(Ed Thigpen)과 함께 한 트리오의 연주 실력 역시 하루이틀 한 사람들이 아니다보니 안정적이며 유려하다. 녹음도 뛰어나 아마도 오디오 애호가들이 가장 많이 듣는 모던 재즈 앨범 랭킹 같은 게 있다면 그 가장 높은 곳에 이 앨범이 있을 것이다. 다방면으로 뛰어난 앨범이라 만듦새는 피터슨의 앨범들 중 단연 가장 단단하다.
나는 이 만듦새의 지점에서 피터슨이 관대할 수 있었던 이유, 관대한 동시에 대단할 수 있었던 이유를 찾았다. 피터슨이 잘 하기도 했지만 이 앨범에 특별한 앨범의 반열에 오른 것은 앨범을 구성한 요소들이 다들 빼어나며 그 요소들을 제공한 사람들이 피터슨과 편히 교류하며 알차게 주제를 다뤘기 때문일 것이다. 선곡 좋아야지, 연주 잘 해야지, 녹음 잘 해야지, 엘피 잘 찍어야지, 판촉기획 잘 해야지 나오는 앨범이다. 그리고 피터슨과 사람들이 그리 잘 어울릴 수 있었던 건 결국 피터슨이 충분히 단단했기 때문이다.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줘도 아무렇지 않을 만큼 단단했기 때문에 그는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며 사람들과 말과 일을 섞었다. 그의 커리어에서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는 대충 하며 다 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앨범이 200장이나 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50년 동안 일이 계속 들어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인기와 불멸의 명예를 얻었다. 피터슨이 늘 그렇게 내놓고 살던 중 운때가 맞고 구성원들의 시너지가 긍정적일 때 이런 앨범이 나오는 것이다. 남들이 최선을 다 해야 얻을 수준을 그는 간 쓸개 다 내줘도 남겨둘 수 있었을 만큼 단단했기에 그는 오래 했고 많이 했고 종종 이런 앨범을 냈으며 관대했다.
생각해보면 피터슨은 그 누구와 붙어도 지지 않는다. 게다가 이기지도 않는다. 짐 홀(Jim Hall)이 그 누구와 붙어도 앨범을 자기 앨범으로 만드는 사람이며 마티 페이치(Marty Paich)는 본인 앨범도 참여한 누군가의 앨범인 것처럼 만드는 사람인 것에 반해 피터슨은 그 누구와 함께 해도 지지 않고 이기지 않는다. 밀트 잭슨(Milt Jackson)과 함께 한 앨범 ‘베리 톨(Very Tall)’에서 둘은 불타는 싸움을 하는데(그 앨범은 두 사람의 악기가 각 채널로 나눠져 있어 둘의 싸움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진다), 그 잘난 잭슨이 풀 컨디션으로 달려들 때 피터슨은 늘 그랬던 것처럼 화려한 손놀림으로 어마어마하게 많은 노트를 튕겨낸다. 결국 둘 다 지지도 않고 이기지도 않은 채 마지막 곡 연주를 끝낸다. 듣는 사람은 그저 좋으니 누가 이기고 누가 져 좋은 게 아니라 그 둘의 수준 높은 경기를 봤다는 것만으로 좋다. 피터슨은 이기지 않는다. 그리고 지지도 않는다. 이겨 누군가의 체면을 상하게 하지도 않고 져 스스로의 체면을 구기지도 않는다. 늘 태도와 기량을 유지하며 활동을 이어가고 사람들과 만난다. 살아본 사람은 알 것이다. 고저 없고 적 없는 인생, 이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피터슨은 정말 단단하다. 따라할 엄두가 안 날 정도로 말이다.
이 앨범에서 가장 유명한 곡은 역시 ’난 네가 좋아(You Look Good To Me)’겠지만 나는 ‘이파네마 소녀(The Girl From Ipanema)’를 좋아한다. 피터슨은 보사노바 곡을 가져다가 피터슨 식 소품곡으로 바꿔 연주한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좋은데, 이건 어때? 아님 말고.” 그 느긋함이 좋다. 느긋함 속에서 할 줄 아는데 안 하는 이유, 안 해도 되는데 하는 이유가 드러난다. 제 아무리 보사노바가 트렌드라고 한들 내가 이렇게 잘 하는데 따라갈 필요는 없지, 내 노랜 아니지만 한번 해주는 것도 좋겠지. 한 시절이 지나가는데 말야. 내가 들은 이파네마 리메이크들 중 원곡에 안 지는 리메이크는 이게 유일한 것 같다.
엘피 이야기
이 무렵 버브의 퍼스트들 품질이 들쑥날쑥하고 가격은 휘청휘청 하는데 반해 이건 품질과 가격 모두 안정적이다. 일단 잘 만들었다. 녹음부터 프레싱까지 부족함 없이 잘 되어 훌륭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상징성이 있는 앨범이자 레이블이 힘 좀 준 앨범이다보니 퍼스트부터 제법 많은 양이 출시되었고 오늘날엔 ‘명성 대비 퍼스트의 가격이 가장 저렴한’ 앨범이다. 2023년 기준 50달러면 충분히 들을만한 컨디션의 엘피를 구할 수 있다. 만듦새가 좋은데 저렴하기도 하니 특별한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면 리이슈를 선택할 이유가 없다.
거진 영속적인 수준의 인기를 누리고 있기에 리이슈 역시 계속 출시되고 있다. 유니버셜뮤직 일반판, 어쿠스틱 사운즈(Acoustic Sounds) 특별판, 아날로그 프로덕션 특별판 등이 있고 심지어 2019년에는 우리나라 제조사 ‘마장 뮤직&픽쳐스’에서 만든 에디션도 등장했다. 일반판도 제법 들을만하니 평범한 오디오 시스템을 위해서라면 그것으로 충분하겠고, 고음질인데 33rpm이 좋으면 AS를, 45rpm까지 가보고 싶으면 AP를 고르면 되겠다.
특기할만한 에디션으로는 2013년 일본 ‘100% Pure LP’ 시리즈로 나온 에디션이 있다. 그 시리즈는 오늘날 ’MFSL 원스텝‘과 동일한 방식으로 만드는데 래커 다음 바로 스탬퍼를 만드는 방식이라 중간과정의 손실이 적고 결국 음질도 조금이나마 좋다. 33rpm의 최선을 알고 싶다면 살만 한데, 나 같으면 그냥 퍼스트로 그치고 말겠다.
같이 들어볼만한 앨범들
오스카 피터슨 트리오의 1963년작 ‘밤열차(Night Train)’: 그럴 일이야 없겠다만 그의 곡들 중 단 하나만 뽑아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이 앨범의 마지막 곡 ‘자유찬가(Hymn To Freedom)’를 뽑겠다. 곡 후반의 트레몰로는 들을 때마다 전율한다.
오스카 피터슨 트리오와 밀트 잭슨이 함께 한 1962년작 ‘베리 톨(Very Tall)’: 피아노 제일 잘 친다고 자부해도 될 사람과 비브라폰 제일 잘 친다고 자부해도 될 사람이 만나 불타는 합주를 들려준다. 듣고 있으면 마이크 타는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오스카 피터슨의 1995년작 ‘크리스마스 앨범(An Oscar Peterson Christmas)’: 후기 텔락 시절 앨범들은 평가절하되는 감이 있는데 이 무렵 피터슨이 창작의지 없이 연주자의 위치에서 만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새로운 무엇을 안 만들어내는 게 죄인가? 피아노를 이렇게 잘 치는데 뭐가 문제인가? 피터슨은 익숙한 캐롤 곡들을 흥겹게 다룬다. 텔락은 준수한 음질로 그 흥겨움을 전달한다. 난 이것으로 충분하다 생각한다.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과 오스카 피터슨이 함께 한 1959년작‘오스카 피터슨과 만난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 Meets Oscar Peterson)’: 이미지와는 달리 제법 까다로운 사람이었던지 암스트롱과 함께 한 모던 재즈 시절 연주자는 몇 없다. 그 몇 중 한 명이 피터슨이니 그 친화력이 다시 한번 드러난다. 앨범에서 피터슨은 암스트롱을 충분히 배려하며 연주하고 마음 놓은 암스트롱은 잘 하는 것을 한다. 합이 잘 맞는 둘은 듣기 편안한 음악을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