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1967.10.13
봄내 신문지에 그리던 일 중에서 나는 나를 발견하다.
내 재산은 오직 '자신(自信)' 뿐이었으나 갈수록 막막한 고생이었다.
이제 이 자신이 똑바로 섰다. 한눈팔지 말고 나는 내 일을 밀고 나가자. 그 길밖에 없다.
이 순간부터 막막한 생각이 무너지고 진실로 희망으로 가득 차다.
1961.09
나는 동양 사람이요, 한국 사람이다.
내가 아무리 비약하고 변모하더라도 내 이상의 것을 할 수가 없다.
내 그림은 동양사람의 그림이요. 철두철미 한국 사람의 그림일 수밖에 없다.
세계적이려면 가장 민족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예술이란 강렬한 민족의 노래인 것 같다.
눈이 소복이 쌓인 날 부암동 환기 미술관에 들러 그의 그림을 눈으로 담고 다시 눈길로 나서는 길.
나의 손은 이미 김환기의 에세이 『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대출하고 있었다.
미술관 중간중간에 써져 있는 그의 글들이 마음에 들었던 게 첫 번째 이유요.
두 번째 이유는 미술관 가장 높은 곳에 있던 그의 그림에 압도되었기 때문이다.
그 그림은 족히 내 키의 두 배만 하고, 폭은 내가 양팔을 뻗어도 안을 수 없을 크기의 대작이었다.
멀리서 봤을 때 그림이 풍기던 빨갛고, 파랗고, 노랗던 빛깔이 기억난다.
자세히 그림을 들여다 보고 나는 한번 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는데 큰 캔버스를 채운 촘촘한 점과 선들 때문이었다. 그 아래에서 감탄을 하며 그림을 우러러보다, 문득 내가 서있는 자리가 큰 캔버스를 채우기 위해 우러러보았을 화백의 자리라고 생각하니. 괜히 그의 생애와 생각이 궁금해졌던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어찌 예술가들을 쉬이 한량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늘 정진했다.
그의 일기 속엔 작품의 진도, 홍대예술교육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오늘날의 서울을 연상케 하는 도시에 대한 사유들이 등장하며 그는 뇌출혈 수술로 사망하기 한 달 전까지 기록을 쉬지 않았다.
뉴욕시기 1년 전인 1962년의 기록에는 '이방에 향수가 가는 것은 그 시절 마치 경기장에 나간 마라톤 선수처럼 긴장하며 달리던 제작생활이 아쉬워져서 일 게다'라는 글이 있다. 이는 그의 파리시기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떠올리게 한다.
1913년생인 김환기의 시작은 남들과 달랐을 것이다. 그랬기에 물감을 사고 20살에 동경유학을 가며 그림에 미래를 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피할 수 없는 역사 앞에서 그 역시 한 명의 동양 사람이자, 한국 사람일 뿐이었다. 격동의 시대를 살아내고 마침내 오늘날까지 붓, 물감 그리고 화백 김환기로 기억되는 이유는 보이지 않는 그때를 기다리며 묵묵히 살아냈을 이들처럼, 본인의 작품이 인정받을 그날을 기다리며 자신을 건 생애를 쏟아부었을 그의 정진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한 획을 그어낸 이들은 모두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을 때, 자신을 향한 남다른 결단을 잃지 않고 살아갔기 때문 아닐까.
예술이란, 끈기와 정진뿐이다.
그저 한량의 마음으로는 아름다움도 세월처럼 어느 화폭에도 담지 못할 것이다.
영화도 결국 한 장면을 남기느냐, 마느냐로 결정되는 법.
감각에만 의존하는 인간은 예술가를 동경하는 한량에 그치지 않는다.
두뇌가 빈곤하면 제작이 막히게 되니 공부를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는 그의 말처럼.
정진하고 붓잡기를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예술이 내 곁에 머물러 준단다.
나는 정진할 것이다.
예술가의 시선으로 세상의 아름다움을 포착하며, 내가 만들어낸 창작물로 세상과 소통하고,
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 기록가로 늙어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