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에슈턴, 미키7
지금 우리를 봐. 내 삶은 지난 6주에 불과하고, 네 삶은 지난 며칠에 불과해.
우리는 하루 살이 같은 존재들이고, 마샬이 시체 구덩이에 밀어 넣으면 우리 삶은 그걸로 끝이야.
나인이 재생탱크에서 나오든 말든 나는 상관 안 해.
나인은 내가 아니니까.
나인은 그냥 내 침대에서 자고 내 배급카드를 사용해 배를 채우고 내 물건들을 사용하는 다른 사람일 뿐이야.
처음 이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때,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봉준호 영화로 나온다니까...먼저 읽어보고 싶은 어떤 허영심(?)으로 읽어 내려갔어요.
SF의 매력(?)을 알아갈 만할 때 소설이 끝난 것 같아요.
실제 하는 것에 의존하지 않고 모든 것들을 나의 상상으로 그려낼 수 있다는 매력.
여전히 그 매력을 알아가는 중이고...
저는 미키 17을 더 재미있게 볼 준비를 마친 것 같아요!
이후 문장을 필사하는 시간을 거치면서야 소설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에 가까워진 것 같습니다.
제가 느낀 바는 아래 두 가지 랍니다.
1. 이 이야기는 내 안에 있는 열쇠를 찾는 여정이라는 것.
-내 안에 있는 '본질'이 하는 말에 집중해야 한다. 그게 삶의 열쇠가 될 것이니.
: 우리가 네 부속물을 파괴했다. 네가 본질이야?
: 응 내가 본질이야.
: 나도 본질이야. 우리 이야기할까?
그렇게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때가 언제인지,
내가 알지 못하는 '본질'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지금의 우리는 알 수 없어요.
그렇지만 미키에게 의문의 신호가 계속되었던 것처럼.
노크를 할 겁니다.
나를 놓아버리지 말고 기민하게 그 신호를 감지해보려 합니다.
답은 외부에 있지 않다는 것.
내 안에 품고 있었다는 것이 길 잃은 삶에 심심한 위로가 되는 부분이었습니다.
2. 나는 몇번째 생을 살고 있는걸까.
이쯤에서 사고실험을 한번 해보기로 하자.
여러분이 잠자리에 들면 잠이 들었다가 다시 깨어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상상해 보자.
당신은 죽는다.
당신은 죽고 내일 아침부터 다른 사람이 당신의 삶을 대신 산다.
그는 여러분의 모든 기억을 가지고 있다.
모든 희망, 꿈, 두려움, 소망을 기억한다.
그는 자신이 당신이라고 생각하고 당신의 친구들과 사랑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당신이 아니다.
내가 복제 가능하고 죽음으로 또 다른 내가 생성된다면.
내 모든 기억을 가졌고,
내 이름으로 불리고,
내 침대에서 내 물건들을 사용하는 그를
과연 '나'라고 할 수 있을까?
미키는 스스로 이런 질문을 하고 답을 내립니다.
이후 '본인'으로 살아가는 시간의 주인이 되었죠.
이 소설을 읽으면서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의 내가 죽은 뒤,
이 생의 모든 기억을 가지고
나와 똑같은 모습을 한 내가 태어나
지금의 이름으로 불린다 해도.
현재의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할순 없을거라는것.
다른 시대에서 다른 선택들을 하면서.
그게 또 다른 삶의 모양을 만들어 낼테고
...
그렇게 지금의 나는
누군가의 반복되는 n번째 모습일수도 있겠구나 .
우리가 기억하는 한 이 유일무이한 생이 사실은
몇 번째일지 모르는 재생탱크를 반복하면서
태어났을 몸이라는 생각을 하면
오늘 내가 사는 이 시간에서
'나의 의미'를 찾아가는 삶을 살고 싶어 집니다.
조금 더 잘 살아보고 싶어져요.
내가 가진 지금의 시간을.
환한 빛과 함께 깨어날 매일을.
상상으로만 그렸던 미드가르드의 봄이
나의 삶에 실제로 펼쳐지길 바라면서
미키17의 독후감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