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두 달 전부터 새로운 독학을 시작했다. 러시아어 공부이다. 책장 한편에 박혀 있던 공부 책을 다시 꺼내서 읽고 책도 사서 보는 중이다. 그런데 혼자서 하는 독학은 한계가 있는 법이다. 처음 의도는 키릴문자권역으로 여행을 가는데 도움이 될까 하여 시작한 것이다. 문자를 알아야 하다못해 그 나라 식당 간판도 이해를 할 수 있다고 느꼈다.
러시아어와 나와의 인연은 제법 오래되었다. 한러 양국수교가 되기 전에 러시아어 공부를 했다. 제법 열심히 했고 약 반년정도를 배웠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도 들었다. 소련에 가지도 못하는데 이걸 배워서 언제 써먹나 했다. 그런데 의외로 양국 수교는 빨리 왔다. 그리고 업무차 모스크바에 갈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다. 공항에서 시내를 들어가는 길목에 서 있는 큰 광고판의 글씨를 대충 알 수 있었고 메트로를 타면 안내방송이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그게 나와 러시아어와의 연관성의 전부였다.
이후 나는 오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내 사업을 시작했다. 새로 시작한 업무는 해외 무역을 중계하는 오퍼상을 시작했다. 당연히 러시아어는 전혀 필요가 없었고 오직 영어만 사용이 되었다. 해외 파트너들 과의 모든 거래는 오직 영어만 필요한 것이다. 그러다가 한 번은 어떤 해외 거래선에서 협력 의뢰가 들어왔다. 출처는 소련사람이다. 그 또한 지방에서 무역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이었다. 나와 거의 유사한 업무를 하는 무역인이다.
그의 제안은 이러했다. 자기는 오토바즈라는 국립 자동차회사에 부품을 납품하는 일을 하는데 연료호스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오퍼상의 업무는 흔해 말해서 무엇이던 다 거래를 할 수 있는 역량이 있어야 한다. 한 마디로 바늘에서 함정까지 모든 거래가 가능하다고 흔히 말한다. 이 소련 교역자와 업무를 하는데, 조금 하다 보니 단 한 가지 어려운 문제가 생겼다. 그와 교신을 하는데 그는 영어를 말하고 쓰지 못하고 나는 러시아를 업무에 활용할 정도가 안 되었다. 그는 영어번역기를 통해서 나와 소통을 하게 되었다.
지금부터 약 20년도 더 되는 시기에는 인터넷도 도입 초기여서 PC통신이라 부르는 방식으로 언어 소통을 했다. 따라서 그와 업무 소통을 하면 거의 몇 시간을 계속해야 되었다. 어떨 때는 거의 새벽까지 PC를 통해 언어를 소통하는 씨름을 해야 했다. 이때부터 그와 계속해서 약 반년 이상을 연결해야 했다. 우선 자동차 연료호스를 제작하는 회사를 섭외하여 샘플을 만들어야 되었다. 그리 만든 샘플은 러시아 국립 자동차 품질연구소에 인증을 받아야 하는데 이 인증이 없으면 자동차 회사에 납품이 불가했다.
일차, 이차 연료호스 샘플을 만들어 현지 인증기관에 보냈는데 약 10여 개 항목 중 계속 한두 개가 해결이 되지 않았다. 마지막 3번째 샘플이 합격되어 드디어 블라디보스토크로 컨테이너 수출을 시작했다. 그러나 계속될 것 같은 수출의 즐거움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세상은 항상 생각지도 않은 새로운 대안이 나오기 때문이다. 어쩠던 이런 힘든 과정이 있어서 러시아와의 인연이 지금도 생생히 회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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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서 키릴문자를 사용하는 지역은 구 소련의 위성체계에 속해 있던 나라들이다. 원래 합병되어 있던 나라들은 1990년 소련의 특수한 정치 지도자의 출현으로 상상치 못한 대변혁이 일어났다. 고르바초프라는 소련 지도자의 영향이다. 거대제국인 소련이 경제난으로 붕괴를 시작한 것이고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새로운 개혁정치를 시작했다.
소위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이다. 해결책으로 우크라이너와 소수국가들은 소련을 해체하기로 했다. 이때 약 11여 개 국이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했다. 그리고 소련은 러시아국가연합(CIS)으로 재탄생했다. 위성국이었던 몽골도 이때 자주독립국이 되었다.
문제는 이 모든 나라들이 거의 거의 70년에 이르는 동안 써왔던 키릴문자를 현재까지도 사용하고 있다. 대부분 나라에서 언어는 다른데 문자는 키릴문자를 쓴 것이다. 근래에 나는 관광으로 몽골을 여러 차례 갔었다. 키릴문자와 완전 100%는 아니지만 거의 같은 문자를 쓰고 있다. 그리고 러시아어는 제2외국어나 공용어로서 아직도 구소련권의 많은 사람들이 사용되고 있다.
마치 우리가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지만 상당히 오랫동안 일본어가 우리 언어에 여전히 잔존하고 있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나는 내년 여름에 키르기스스탄에 가기로 했다. 여기도 마찬가지 현상이다. 언어는 독립되어 키르기스어를 쓰지만 문자는 러시아 키릴문자를 쓰고 있다. 수도인 비슈케키는 제일 많이 러시아어가 그대로 혼용된다고 한다.
북방관광 갈 때 제법 도움이 되겠구나 하는 마음에서 러시아어 공부를 새로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던 중 우연히 러시아어 스터디 클럽을 찾아보았다. 거기에 첫 참여를 해 보았다. 신촌에 있는 러시아어 스터디 클럽은 특정 시간대에 공간을 임대하여 활용하고 있다. 처음 간 이곳 지하공간에는 다양한 스터디 모임이 운영되고 있었다. 강사를 포함하여 7명이 모였다. 우리를 가르치는 강사는 고려대학에서 공부를 하는 원어민 선생이다.
한국말을 완벽할 정도는 아니지만 말하고 글을 쓰는데 전혀 어려움은 없을 정도였다. 2시간을 계속해서 작문과 대화연습을 했다. 초급과정과 중급과정을 함께 혼합하여 운영하였다. 거의 한 달 정도 먼저 시작하여 나로서는 상당히 불리한 환경이다. 또한 그녀가 쓰는 러시아 글자체나 말하는 언어 습속에 익숙해지지도 않은 상태이다. 역시 우려가 그대로 들어 났다. 내가 우려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배우는 학생들은 벌써 제법 일정한 수준이 형성되어 있는데 반해 나는 처음에 제법 답답할 수준이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다. 세월이 흘러야 한다. 그 과정이 조금 부끄럽고 창피하지만 열심히 따라가야 한다. 거기에 참석한 사람들의 연령은 주로 20-30대가 중심이다. 나는 그들에게 나이 든 할배처럼 여겨지는 상태일 것이다. “저 할배는 무엇하러 여기에 왔을까” 하는 생각도 들 것 같다. 원어민 선생에게 쫓아내지 않으면 계속 오겠다고 말했다. 공부를 마치고 톡방에다 이런 문자를 보냈다. “로마시대에 노예로 끌려온 사람이 타국에서 언어를 배우며 익히는 심정으로 하지요. 이해해 주세요.
이런 말이 있지요. Victory belongs to the most tenacio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