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 세계 역사를 보면 의외로 많은 정략혼인이 등장한다. 대부분 왕족 여성의 경우에 흔히 발생된다. 국가와 국가사이에 필요한 선린관계를 구축할 때 우호조약을 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이 결혼동맹으로 난제를 해결하는 편이다. 당사자야 정책적인 혼인을 원해서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마지못해 국가를 위해서 희생하는 구국의 차원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성공적인 혼인동맹이 오래 유지하는 케이스는 그리 많지 않은 것을 본다. 대뜸 생각나는 대로 보면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도 그러하고 루이 16세와 마리 앙뜨와넷트도 그러했다. 그런데 이들은 무척 금실이 좋은 부부였다. 어쩔 수 없이 정략혼으로 형식적인 부부로 산 그 반대는 더 많다.
당시 흉노 유목제국은 강대한 기마 군사력을 소유했으나 정작 그들 고유문자는 없어 지속적 국가발전에 장애요소가 되었다. 흉노의 역사를 직접 만든 자가 아닌 패권 상대방에 의해 기록되어서 그들의 논법과 필요에 의해서 곡필이 되기도 했다는 점도 가감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그중에 당당하고 용맹한 묵돌선우(황제)와 같은 개성 강한 왕들의 기록도 흥미를 자아내게 한다. 그중에서 이번에는 흉노와 관련된 여성의 이야기를 풀어 보자.
비파를 든 왕소군 (Namu Wiki 에서 그림 인용)
왕소군이라는 전설적 미녀의 이야기이다.
중화역사상 絶世美女가 4명이라 알려진다. 양귀비, 서시, 초선과 왕소군을 든다. 소위 경국지색이라는 말은 나라를 흔들 수준의 미인들을 의미하여 다분히 국가 안위와 연관되었다고 봐야 한다. 그중에서 나라를 위태롭게 하지 않고 다른 나라와 우호적 평화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한 것은 왕소군 그녀가 유일해서 더 큰 존경을 받는다. 다른 나라에서는 그녀를 잘 모르지만 흉노와 중화 세계에서는 그녀를 많이 기억하는 편이다.
한나라 유방이 죽자 흉노의 묵돌선우가 여태후에게 장문의 러브레터를 보낸다. 서로 홀로 적적하니 나와 새로운 인연을 맷는 것이 어떤가 하는 내용이다. 천하 통일제국의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한제국 여태후에게 이런 류의 제안을 할 정도로 당시 흉노는 강한 제국이었다. 조공을 받던 시기였다. 화가 난 여태후는 전쟁까지 불사한다 했으나 당시 미약한 한의 군사력 때문에 울분을 참아야 했다. 후에 흉노에게 크게 앙갚음을 한 것은 강성해진 한무제 때이다.
한편 한나라에는 황제를 위한 후궁이 약 3천 명에 달했다 한다. 백제에 있었다는 3천 궁녀는 큰 과장이었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후궁들이 있어서 화가들이 그들의 그림을 그려서 황제에게 그림첩을 보여주는 식이었다. 궁녀의 자태 그림 리스트를 보고 선택을 하라는 것이다. 그림 중에서 마음에 들면 그 때야 황제를 만날 수 있게 하는 방식이다. 즉 그림이 잘 나와야 하므로 모두가 궁중화가에게 과외 돈을 주고 아름답게 보이는 그림을 그려 달라고 요청을 하였다. 그런데 정작 가장 미모를 가진 왕소군은 이 같은 요청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왕소군의 실물 그림은 별 볼일 없이 그려졌다. 당연히 황제는 왕소군을 부를 일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흉노의 선우(호한야)가 한 황제에게 공물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 공물 리스트 중에 공주를 보내 달라고 요청이 포함되었다. 황제는 어쩔 수없이 궁녀 중에서 그림을 보고 별 볼일 없는 궁녀를 보내려 했다. 선택된 궁녀가 왕소군이다. 그리고 흉노의 선우가 왕소군을 데려가려 왔을 때 황제는 처음으로 그녀를 보게 된다. 처음 본 순간 그녀의 절세미색에 너무나 놀라서 몹시 후회를 하게 된 것이다. 絶世미녀란 이 세상에 절대 나와서는 안 되는 아름다운 여성을 의미하니 그 의미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번 그녀를 선우에게 주기로 결정해서 무를 수도 없는 상황이다. 나중에 그를 추녀로 그렸던 궁중 화공은 황제의 분노로 처형을 당한다. 반대로 당대 최고의 미녀를 얻은 흉노의 선우는 크게 기뻐하였다. 그래서 그가 재위에 있을 때부터 약 60년간 한나라와 가장 좋은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오랫동안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했었다. 왕후를 의미하는 연지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연지는 그때부터 여성용 얼굴 화장 장식을 나타내는 변형된 의미로 아직 남아있다.
내몽골 왕소군 능묘 (Chinese wiki 에서 그림 인용)
기록에 의하면 왕소군은 처음 오랑캐 군주에게 시집을 가게 되어 매우 슬퍼했지만 선우가 늠름하게 잘생기고 그에게 사랑을 주어 행복한 왕비의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녀는 한나라에 있을 때보다 더 자유롭고 천막식 궁전에서 호사스러운 시절을 보냈다고도 했다. 길쌈 같은 한족문화와 기술등을 흉노족에게도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그녀가 익힌 옷 만드는 솜씨를 주위 사람들에게 알려 주어 모두가 그녀를 존경했다. 그녀는 거기서 한평생 후손을 키우고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그녀의 무덤은 지금 내몽골 후허하오터에 남아있다. 아주 거대한 왕릉 같은 높은 봉우리로 사당과 동상 등이 있다. 그런데 왜 이리 고분이 커졌을까 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 당대의 습관은 존경하는 고인이 편히 쉬라고 능묘를 방문해서 제사를 지낼 때는 소량의 황토를 뿌리는 관습이 있었다. 오랜 기간 방문객들이 뿌린 십시일반 흙으로 지금의 거대한 능이 만들어졌다. 기간으로 따지니 약 2천 년 동안 쌓인 황토의 통합이다.
또 많은 왕릉은 항상 도굴꾼들의 도굴 대상이 되었지만 왕소군 무덤은 한 번도 이런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녀의 존경 정도가 너무 높아 만일 도굴을 한다면 그 비난의 화살을 도굴꾼과 그 후손에까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도굴 시도를 못 했다는 것이다. 존경과 흠모를 받은 황후로 남아 있었다는 것인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하여 향을 피우고 제사를 지내고 간다는 것이다. 왕소군 묘에 제사를 지내면 집안이 흥하고 아이를 못 낳는데 효험이 있다는 후세 풍설도 작용했다.
후세에 기억되는 몇 가지 전설에 의하면 그녀가 흉노로 시집가는 것이 하도 슬퍼서 비파를 켜자 지나가던 기러기도 그 아름다운 미색에 홀려 날개 짓을 잊고 연못에 빠져 죽었다는 일화가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추운 북방지역에 살면서 봄을 보는 감각을 시로 표현했다. '춘래불사춘'이다.
'봄은 왔지만 봄 같지 않구나’라는 문구이다. 지금 우리도 봄이 올 때 집벽에 써 놓고 즐겨 보는 시구이다. 이 말은 봄을 달리 보는 시각을 나타낸 의미 있는 구절이다. 일제강점기에도 시인 작가들이 많이 인용했고 민주화를 희망하는 이들의 희망 어린 표현이었다.
왕소군을 보며 그녀를 기억하는 것은 그녀의 미모가 아니라 그녀에 대한 존경심이라 생각된다. 일국의 왕후라 하면 이 정도는 돼야 하는 것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