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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van shim May 18. 2023

흥미로운 흉노 이야기(2), 외교전략

( 더 영특한 외교전략)


유목-정주세력 간, 상호 치열한 외교전 이야기




중화역사에서 유목세력이 반만년 역사를 통해 접촉의 끈을 한시라도 놓은 적이 없었다. 유목인을 야만문명이라고 깔보았지만 탁발. 선비족인 수. 당제국과 몽골인의 윈나라, 만주인의 청나라 모두 북방계 유목민 세력이 중화역사를 지배한 역사가 있었다.


북방은 춘추전국시대부터 장성으로 담장을 쌓고 오랑캐의 지역으로 냉대하던 곳이다. 그 이후의 역대왕조도 장성밖이 강성해지면 꼭 정벌해야 하는 적대세력으로 간주했다. 중화의 힘이 약했던 시기에는 흉노. 돌궐족에게 조공을 바치기도 했다. 한무제 때 흉노를 정벌했었지만 청나라 시절까지 상호 적대시 정책은 계속 유지되었다. 


역대 중국왕조들을 일차적으로 북방지역에 관심이 덜했다. 그들이 향유하는 지역도 엄청 방대하여 관리하기가 힘들었는데 북방 불모지의 입맛을 다실 필요가 없었다. 온화한 농경문화에 익숙한 그들은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쓸모없는 북방지역은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다 생각지 않았다. 여름이 너무 덥고 겨울은 너무 추운 곳이다. 그곳은 야만족들이 목축이나 하면서 사는 곳으로 치부했었다.


흉노는 북방 지역에 있는 정주민을 급습해 그들이 추수한 농작물들을 약탈한다. 습격은 동계절을 대비하여 부족한 식량을 비축한다는 의미이고 또 흉노 부족을 상호 연합시키는 결속의 작용이다. 약탈의 시기는 가을이다. 통통한 말이 있어 약탈에 제일 좋은 계절이다. 천고마비라는 고사는 여기서 유래하였다. 어떤 때는 두 제국 간 상호 합의하여 국경지역 물품교역 장터를 열 때도 있었다. 이때도 흉노에게 절대 군사적 용도가 되지 않는 물품의 거래만이 허용되었다. 현대의 전략무기 금수조치를 하고 있는 나라와 같다. 군사적 전용물품 예를 들면 동과 철의 거래는 간 큰 상인 간에 밀거래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중화세계에서 공급받는 물품이 안정적이지 않아서 흉노는 수입선을 다변화하게 된다. 바로 서역에서 이다. 모든 유목민족은 장기적 국가유지를 위해 교역에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칭기즈칸의 서역 원정도 대상단을 몰살한 보복조치지만, 발단은 교역을 중요시하게 여겨 서역과 상호 교역을 열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





흉노의 선우들은 한때 한나라가 제공하는 물자를 받고 약탈을 하지 않기로 약속했었다. 그러나 중원이 제공하는 물자는 너무 적었다. 양국 간 상호협정에 의해 공급되는 물자를 보면 곡식 5천 곡, 술 1만 석, 비단 1 만필 정도이다. 이 정도면 큰 부족의 회식 한판에 해당되는 정도이지 부족을 건사할 정도로는 극히 부족하였다. 흉노의 선우들은 변경지역에 상호 교역시장을 요구했었다. 정상적인 구매나 교환으로 상호 필요한 물품을 조달받고 싶었다. 


그러나 중화세계는 정치적 이유로 국경지역 무역을 금지하였다. 심지어 북방지역에 장성을 쌓아 모든 접촉자체를 금기시하였다. 즉 약탈을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하였다. 흉노로서는 당연히 생존을 위해 침공을 할 수밖에 없었다. 부족한 식량 약탈을 하기 위해서이다.


흉노족의 침공에는 부수적 의도도 있었다. 정치적 목적도 깔려 있었다. 일종의 협상 도구로 활용했었다. 전쟁과 협상을 번갈아 가며 우월한 위치에서 중원제국과 협상을 할 수 있었다. 실제로 기존의 협정은 파기되고 흉노의 의도대로 더 많은 평화의 대가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 평화는 일정기간 유지되기도 했다. 흉노의 선우들을 현재의 시각으로 본다면 외교의 고수들이다. 평화를 위해 지불하는 비용은 기실 전쟁을 수행했을 때보다 아주 저렴하다는 것은 기본 중에 기본이다. 중화세력에게 전쟁비용이 평화유지 비용보다 훨씬 비싸다는 것을 인식시키기 위함이다. 이러한 그들의 전략적 의도를 한나라도 충분히 인지했지만 싼 비용조건을 받아들인 것이다.


영특한 흉노는 중원을 침공하여 약탈을 하지만 절대 지역을 점령하거나 지배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의 군대가 몰려오기 전에 물러갔다. 전형적인 치고 빠지는 전술이다. 이것은 유목민들의 기본 전술인데, 유리하면 나아가고 불리하면 퇴각한다는 손자병법과도 일맥상통한다. 후에 한무제 때에 이들의 고약한 버릇을 고친다고 그의 치세에 40년 원정을 했지만 그 후유증으로 국력을 손실한 한나라 자체는 결국 소멸하게 되었다. 한무제는 흉노와 쭉 유지해 오던 화친정책을 완전 페기하고 골칫거리 흉노를 지구상에서 소멸하려 의도했었다. 물론 그의 희망사항이었지만. 이쯤 되면 진정으로 누가 더 영특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유목세력과 정착세력으로 나눈 양대 진영은 서로 다른 전술적 고려사항이 있었다. 흉노는 특정지역을 빼앗겨도 중화세계로서는 가져갈 풍요로운 물자나 농경지라 할 것이 없었다. 오히려 흉노 땅에 원정 간 그들은 병참 물자의 긴 행렬이 필요해서 초원에서 몇달 이상을 버틸 수가 없었다. 가만 놔두어도 어려운 국면에 처할 수밖에 없다. 초원은 동장군이 빨리 오기 시작한다. 모스크바를 점령한 나폴레옹 군대가 거기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어 결국 허무하게 패배를 자초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원정하여 전투를 벌이는 중원제국의 치명적 약점이다. 흉노는 그 점을 잘 활용하였다. 


고정된 방어 성곽과 같은 지형에서의 전투는 중국이 유리할 수도 있지만 변경지역에서의 전투는 흉노의 내부 지역이고 전병력을 집중할 수 있어 어차피 기울어진 전투지형 조건이 되었다. 흉노는 힘이 부치면 다른 곳으로 근거지를 피하면 된다. 전투전략을 짜기는 아주 쉽다. 기회를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장기전으로 가면 한나라 대군이 더 견디지 못한다는 것을 흉노는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원정군이 지쳐 중원으로 귀환하는 낌새가 보이면 흉노족은 벌떼처럼 다시 공격의 고삐를 당긴다. 초원의 전투에서는 초원민족을 당해내지 못한다. 그것이 수천 년간 유목민족이 유지하게 된 이유이다.


그러면 북방 유목민을 다루는 올바른 대처법이 없었을까. 고민 끝에 한나라는 북방지역을 거의 방임하는 정책을 찾게 된다. ‘니 맘대로 하세요’이다. 이게 가장 현명한 대처 방법으로 인식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흉노족이 계속해서 변경을 침공해도 별 효과가 없자 결국 물자가 부족한 북방세력은 머리를 숙이고 협상을 요청했다. 반세기동안 한나라는 배짱을 부렸고 결국 흉노는 불리한 한나라의 협상조건을 수용하게 된다. 상호 간 평화를 일정 기간 동안 유지하게 되었다. 때로는 한쪽의 무반응도 좋은 대처법이 되기도 한다. 물자가 많은 측이 시간과의 싸움에서 유리한 것이 증명되었다. 현대전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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