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처럼, 혹은 코냑처럼

by 김인수 스테파노



아침 기온이 30도를 육박하는 여름 더위를 나만 견딘게 아니다. 집 베란다에 사다놓은 와인이 있음을 잊었다. 무언가를 찾으려 풀숲 뒤지듯 헤집다 손에 만져진 와인병은 뜨끈했다. 아차 싶어서 부랴부랴 시원한 곳으로 옮기며 아까운 술을 내탓에 못먹게 되었다고 작은 탄식을 했다.

한 잔의 와인에는 햇살과 바람, 흙과 농부의 발소리 그리고 포도의 기억이 담겨 있다. 싱그럽고 가볍고, 때로는 신선한 그 순간은 꽤나 아름답다. 철학적으로 어쩌면 와인은 아직 숙성되지 않았지만, 그 자리에서 충분히 빛나는 청춘과 닮아보인다. 그래서 와인은 ‘지금’을 즐기는 술이라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오래 숙성된 와인도 있으나 고가라 자주 애용치 못할 그림의 떡이니 논외로 하겠다. 어느 작가가 비싼 와인을 마시든 저렴한 와인을 마시든 취하는 건 같다고 한 말을 위안삼으며.


프랑스 코냑 지역의 백포도로 만든 와인. 이를 두 번 증류한 뒤 오크통에서 짧게는 2년, 길게는 10년을 묵혀 얻는 브랜디의 한 종류가 코냑. 다시 태어나 새로운 이름을 얻는다.

코냑은 와인을 정제(증류)해서 만들지만, 두 술은 성질과 특징에서 큰 차이가 있다.

참고로 코냑 1병(보통 700ml~750ml)을 만들려면 와인이 약 9병(7~9리터)이 필요하다.

증류를 거치면 알코올 농도와 향이 농축되고, 최종적으로 병입 전 물(증류수)로 알코올 도수를 약 40%로 맞춘다. 와인의 싱그러움은 사라지고, 대신 바닐라와 초콜릿, 오크와 스파이스의 깊은 향이 겹겹이 쌓인다. 알코올은 농축되고, 맛은 단단해진다.

코냑은 서두르지 않는다. 긴 기다림과 숙성 끝에 비로소 세상 앞에 선다. 그건 마치 인생의 후반부가 지니는 무게와 고요 같은 것일지 모른다.


살아가며 “어떻게 사는 게 맛깔스러울까? 와인처럼, 아니면 코냑처럼?”

짧은 생각으로 와인처럼 산다는 건 매 순간의 신선함을 놓치지 않는 삶이다.라고 정의한다. 오늘의 햇살을 즐기고, 친구와 나누는 한 끼의 밥상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것처럼.

반대로 코냑처럼 산다는 건, 서둘러 드러내지 않고 시간을 쌓아내며, 마침내 깊이를 남기는 삶이다. 쉽게 열리지 않지만, 일단 한 번 맛본 이에게 오래도록 기억되는 사람. 지난번 절강성 여행에서 친구랑 맛본 마오타이도 떠오른다.


질문에 대한 정답은 분명 하나가 아닐 거다. 청춘에는 와인처럼 반짝이며 살고, 노년에는 코냑처럼 묵직해지는 것. 혹은 같은 나이 속에서도 어떤 날은 와인처럼 가볍게, 또 어떤 날은 코냑처럼 무겁게 자신을 만드는 것. 삶은 결국 와인에서 시작해 코냑으로 흘러가는 여정일지도 모를 일 아닐까. 빠르게 사라지는 신선함과, 오래 묵혀야 드러나는 깊이 사이에서 우리는 하루하루를 빚어낸다. 중요한 건 와인이든 코냑이든, 그 한 잔에 당신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 어떤 삶을 예쁜 잔에 따르고 싶은가.

와인 같은 지금인가, 코냑 같은 내일인가.

와인을 알아가다 코냑을 맛보고 감탄한 이는 어떨까?


또 한 명의 친구가 아프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중고등학교 동창. 지난달에도 작대기를 대학 동창과 즐겁게 쳤다면 흔적을 날리던 친구다. 이 나이에 중환자실로 들어가면 어쩌란 말인지. 와인, 코냑 타령할 게 아니다.

베란다에서 건진 와인은 변질되지 않았다. 꼬르크 마개를 열고 나온 향과 맛은 폭염을 견뎌내고 그날 저녁에 나를 꽤나 취하게 했다. 많은 생각을 떠올린 폭염속 하루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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