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 + color
우리의 오감 중에 시각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는 전체의 84%에 달한다고 한다. 디자인에서의 '보다'라는 행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그 과정이며 의미가 풍부하여 굳이 Gestalt 심리학을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배울 거리가 많은, 소위 열 일하는 값비싼 감각이다. 영어에도 see, look, watch, gaze 등 '보다'를 설명하는 조금씩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 있지 않은가. 대학에도 시각디자인과는 있어도 청각디자인과, 후각디자인과, 촉각디자인과는 없기도 하고.
'보다'라는 것은 물리적으로는 눈에서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머리와 가슴에서도 동시적으로 일어난다. 이는 기억과 경험, 상상, 되새김, 추측의 과정과 연관되어 시각의 자극이 다른 감각으로 변이되기 때문인데, 재미있는 것이 우리의 시각은 오감이라는 세계의 가장 큰 흡입구라 할 수 있지만 그렇게 효율은 좋지 못하다는 것이다. 보는 것의 정보가 그리 오랫동안 뇌 속에 남아있지도 못할뿐더러 가끔 왜곡이 되어서 시각 정보의 INPUT과 OUTPUT이 정확하게 같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것인데 말이 멋있어서 '기억의 왜곡'이지 얼마나 황당한 결과를 초래하는지는 누구도 조금씩 경험이 있으리라 짐작한다. '코카콜라' 로고의 빨강색을 보여주고 시야에서 치운 다음 여러가지의 빨강색 예시들 중에 방금 보았던 '코카콜라 빨강'을 고르라고 하면 백이면 백사람 모두 다른 빨강을 고르게 되는데, 이것이 얼마나 우리의 시각 기억이 정확하지 못한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보통 물리적인 행위로서의 '보다'라는 것은 물체의 형태와 색깔을 보는 것인데 이 '형태'와 '색깔'의 요소를 다루는 것이 디자인 과정의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두 가지 중에도 우열이 있어서 나름 서로 기억의 과정에서 다투기까지 한다는 것인데, 대개의 경우 '형태'보다는 '색깔'이 우선 지각된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위에 들은 예시인 '코카콜라'의 경우 로고를 아무 설명 없이 보여주고 다시 기억하게 할 경우 알파벳의 멋드러진 곡선 - '코카콜라'의 로고는 디자인 역사에 남을 굿 디자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 의 형태 보다는 빨강의 색깔이 우선 기억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코카콜라'라고 외칠 경우 사람들은 '빨강'을 우선 기억하고 그 다음에 멋드러진 곡선의 로고를 생각해 낸다는 것이다. 가장 먼저 기억되는 '색깔의 시각 기억'이 정확도에서 오류는 많지만 우리들의 오감 중에서는 甲이라는 얘기이다.
비슷한 예로 '병아리 노랑', '낙엽 브라운', '아쿠아 블루', '올리브 그린' 등의 색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병아리와 낙엽, 아쿠아, 올리브 등은 뒤에 오는 색이름을 표현해주는 수식어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그들을 떠올릴 떄의 뽀송, 파삭, 시원, 달콤쌉싸름의 오감을 건드려서 그 색만이 가지고 있느 느낌을 강화시켜준다. 단순한 '노랑', '브라운', 블루', '그린'의 색이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색감각(色感覺)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색이름이 다양해진 이유는 수많은 색깔을 분류해서 그 미묘한 차이를 표현하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그 보다는 색 이름으로 인해 기억되는 색감을 강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영문 색이름도 재미있는 것이 많다. 'Tomato Red', 'Pig Pink', 'Canary Yellow', 'Lemon Yellow', Chestnut Red', 'Charcoal Blue' 등의 색이름에서도 보듯이 대개의 경우 색감각을 강화시키기 위해 보통명사의 수식어가 색이름 앞에 등장하지만 가끔 고유명사가 등장하기도 하는데 'Ferrari Red'가 대표적이다. 얼마나 멋진 빨강이면 앞에 페라리가 붙었을까? 이 빨강은 아마 멋지다는 것 외에도 고급의, 흔하지 않고 속도감 있는, 등의 느낌을 통해 우리의 오감과 상상력을 자극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무튼 '보다'라는 단순할 것 같은 행위에는 이런 수많은 해석이 뒤따르고 더불어 전공 수업 중에 일어나는 온갖 설명(이라 부르고 '썰'이라 해석되는)의 기원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난 퇴직했으므로 이런 '썰"에서 영원히 해방되었고, 그래서, 이런 지식이라 불리는 모든 것들에서 좀 벗어나 보기로 했다. 왜냐고? 난 퇴직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