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곱씹기 딱 좋은 전화번호부 1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잊혀진 사람,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사람....
요즘에야 모두 디지털 전화번호부를 가지고 다니지만 불과 10년 전만 해도 나는 조그만 수첩에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이름, 주소, 전화번호를 적어가지고 다녔었다. 휴대폰이 내 손에 들려있을 때에도 몇 년간은 전화번호부와 휴대폰의 주소들을 동기화시키느라 애먹었던 기억이 있다. 대학 졸업 후 동창회에서 주던 빨간색의 수첩에 부록으로 달려있던 작고 얇은 전화번호부 책은 꽤 중요했다.
수기 전화번호 명부의 가장 귀찮았던 점은 매년 업데이트할 때 정말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거였는데, 해가 바뀔 때마다 동창회 수첩의 그 많은 이름과 주소 등을 다시 적으려면 날 잡고 적어도 하루는 쏟아부어야 했다. 칸은 작아서 플러스펜과 같은 번지는 잉크는 불가능했고 얇은 굵기의 번지지 않는 볼펜 종류만 가능했다. 그래도 이 하루가 그리 헛되지 않았던 것은 하루 해가 바뀔 때마다 지워야 할 이름과 남겨야 할 이름을 나름 구분해서, 지워야 할 이름은 왜 지워야 하는지, 남겨야 할 이름은 왜 남겨야 하는지의 이유를 생각해보고 그 히스토리를 곱씹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 얘는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아도 되니까 지워도 되고, 얘는 찐친이니까 남겨야 하고...... 등의 구분 이유를 만들어 정리하면서 그 사람들과의 과거를 회상할 수 있는 것이 재미라면 재미였다. 가장 애매한 것은 지워도 되고 남겨도 되는 딱 중간의 사람들이었는데, 운 좋게 남겨진 이름들은 해를 지나면서 10년도 넘게 내 수첩에 고스란히 남아서 네모 칸을 소비하고 있었다. 결국 10년 동안 한 번도 연락하지 않은 채로.
지금에야 휴대폰 화면만 클릭하고 이동하면 그 예전 사람들부터 좌악 다 나오는 데다가 굳이 업데이트를 하지 않아도 크게 불편하지 않아서 좋지만, 가끔 리스트를 훑어보다가 얘는 도대체 누구지? 하는 사람들이 툭 튀어나올 때가 있다. 도무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는 사람. 게다가 개인이 아닌 이상한 협회, 부동산중개소, 아파트 관리실 번호는 왜 그리 많은지. 전세살이 하면서 이사를 자주 다닌 데다가 지방의 학교 근처에 오피스텔에 살아서 그런가 관리실 번호만 4개다. 한 번은 항의할 것이 있어서 관리실에 걸었는데 계속 안 받아 열 받던 와중에 다른 관리실 번호를 잘못 눌러서 생긴 해프닝이란 걸 알고는 부랴부랴 정리했었다. 관리실 앞에 아파트 이름이 붙어있어야 하는데 그냥 관리실이라고만 되어 있어서 헷갈린 것이었다. 안 받았길래 망정이지 받았더라면 망신당했을 뻔했다.
전화번호부의 기억은 좋을 때도 있고, 안 좋을 때도 있어서 누군가의 이름을 남길 때야 상관없지만 지울 때는 씁쓸한 기억까지 함께 지워졌으면 할 때도 있다. 가장 지우기 어려운 것도 있는데 그건 망자의 이름과 번호다. 돌아가신 부모님의 집과 휴대폰 번호, 얼마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난 가까웠던 선배의 전화번호, 군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제자의 전화번호 그런 것 들이다. 이런 것들은 삼사 년은 계속 남아서 나의 기억 속으로 밀물 썰물처럼 들락날락거리다가 결국은 목록에서 사라진다. 그때까지는 전화번호부도, 이들과 나눴던 카톡 대화창도 계속 살아있다. 명퇴했을때 사람들에게 많이 알리지는 않았지만 선배에게는 알리고 싶어서 주인도 없는 카톡 대화장에 명퇴의 시원과 섭섭을 주절주절 썼더랬다. 선배가 떠나기 전까지는 아프고 힘들어도 늦게라도 읽어줬는데 먼 길 떠난 후로는 계속 1이 없어지지 않는다. 대화창은 아직 살아있는데......
선배의 남편은, 아직 선배의 전화를, 전화번호를, 카톡을, 기억을 지우지 못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