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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뿌니뿌니 Jan 20. 2022

아파트 1층 릴레이션쉽

땅에 붙어서 살기

아파트에서만 산지 33년이다. 5층, 7층, 8층, 6층, 8층, 7층, 10층, 7층, 2층을 지나 1층으로 왔다. 한 집에서 3.3년이라...... 전세살이, 이사, 중개수수료 흥정하기, 짐 싸기, 관리비 정산의 도가 텄다. 그러고 보니 너무 높이는 살지 않았네. 처음 1층으로 이사 와서는 꼭 캠핑 가서 텐트 치고 사는 것처럼 헛헛하고 밖이 너무 잘 보여서 불안하더니, 이내 사람들이 지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 건 1년쯤 지나니까 덜해졌다. 그리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안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는 걸 곧 알게 되었. 상관하는 건 나였던 거다.


1층에 살면서 좋은 점은 발 망치 걱정 안 하고 걸어 다녀도 아무도 뭐라는 사람 없고, 저녁 먹고  배부르면 거실에서부터 끝방까지 달리기를 해도 괜찮다는 것이다. 가끔은 줄넘기도 200번 한다. 또 하나 좋은 점은 땅과 가까워서 그런가 바깥의 환경과 알게 모르게 관계가 생긴다는 것인데, 주로 땅과 관계되는 것, 나무들, 풀들, 사람들, 동물들이 주인공이다. 길양이가 지나는 길목에 밥을 놓아주고 관찰하면서 가끔은 친해지기도 하고, 겨울에 그 밥을 먹으러 오는 물까치, 까치, 박새들의 손님을 맞기도 한다. 가끔은 밖에서 술래잡기하는 아이들과 함께 나도 안에서 숨바꼭질 할 수도 있다. 우리 집 거실 유리 밖에는 적당한 가림막 역할을 하는 제법 키가 자란 나무가 있어서 거실 외벽과의 사이에 약간의 공간이 생기는데, 가끔 요기가 아이들이 숨는 장소로 애용된다. 자기들도 숨으면서 집 안의 상황이 걱정되는지 꼭 이마에 두 손을 대고 창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 안을 관찰하는데, 내가 소파에 앉아있다가 일어나면 화들짝 놀라 자기들끼리 괴성을 지르며 후다닥 도망간다.


1. 배고픈 길양이 릴레이션쉽

집 밖은 위험해. 그런데 위험한 집 밖이 집인 고양이들이 있어서 이들은 밖에서 먹고, 자고, 싸고 한다. 내가 집에서 고양이를 키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밖에서 사는 동물들이 허투루 보이지가 않았다. 심지어는 비 오는 날 아스팔트에서 허우적거리는 지렁이를 나뭇가지로 들어서 풀 숲으로 돌려보내기까지 했으니까. 배고픈 길고양이들을 위한 1층 만의 릴레이션쉽, 밥을 주기로 했다. 퇴직하기 전에도 학교 근처에 급식소를 두 곳이나 운영한 노하우가 있으니 내 집 앞에 주는 건 사실 일도 아니었는데, 다만 아파트 주민들의 눈을 피해서 요령껏 잘 주는 게 중요했다. 고양이 단골이 생겼다. 그런데 단골은 자주 바뀌었다. 아가도 있었고 덩치 큰 수놈에 한쪽 귀 끝이 잘린 중성화한 고양이도 있었는데 아마 근처 캣맘이 돌봐주는 아가였나 보다. 밥은 내 방 창문의 바깥쪽으로 난 조그만 발코니에 주었는데, 자기들도 나름 경계를 하느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처럼 내가 안 보이면 살금살금 다가와 먹고는 그래도 불안했는지 고개를 빠끔히 들고 창 안쪽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창의 유리가 워낙 밖에서 안이 잘 안 보이는 특수 유리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고양이가 안을 쳐다보기라도 하면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얼음이 되어야 했다. 밥 먹다 말고 놀라서 도망갈까 봐.

눈 오는 날에는 고양이 발자국이 선명해서 너무 이뻤으며, 가끔은 사냥을 하고 털만 남은 찌꺼기를 남겨놓기도 했으며, 단골이 된 후에는 밥 집사를 빠꼼히 기다리기도 했으며, 늘어지게 자기도 했다.

 

2. 배고픈 새 릴레이션쉽

집 앞 소나무 가지에는 까치, 물까지, 참새, 박새, 비둘기 등이 놀러 온다. 겨울이 되면 특히 도시의 새들은 먹을 것이 없어 고양이 밥을 얻어먹고 겨울을 나는데, 새들은 별로 머리가 좋지 못해서 어제 먹은 밥자리를 잊어먹고 오늘은 오지 않는다. 새들은 그래서 단골이 없다. 어쩌다 한 마리가 밥자리를 발견하면 같은 종류의 새들이 몰려와서 한꺼번에 밥을 먹는데 나름 서열이 있는 것처럼 서로 돌아가며 먹는다. 사료 알갱이가 새가 먹기에는 좀 큰 편인데도 고개를 뒤로 젖혀 몇 번 까딱까딱 하다가 꿀떡 하고 삼킨다. 종류가 다른 새들이 모일 때는 까치가 제일 대장이고 물까지, 참새가 그 뒤다. 비둘기는 따로 아무도 없을 때 와서 먹는다. 비둘기는 그 수가 제일 많은데도 단체로 오는 법은 없고 꼭 따로 와서 먹고 간다.


3. 눈사람 릴레이션쉽

높은 층에 살 때는 그저 회색의 뿌연 하늘에 내리는 하얀 눈송이를 보고 좋다 했지만, 1층에 사니 눈이 내리는 모습과 쌓이는 모습을 동시에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눈이 많이 오는 날엔 주책없는 이 아줌마는 나가서 고무장갑 끼고 눈사람을 만들어 거실 창 밖 잘 보이는 곳에 모셔두었었다. 왜 갑자기 눈사람에 꽂혀가지고 지나가는 초등학생들 눈치 받으며 이걸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아주아주 롱롱 타임 어고우 비탈진 곳에 살았었을 때, 눈이 많이 오면 너무 비탈져서 골목길에 차들은 못 다니고 동네 아이들만 신나게 세숫대야 들고 나와서 그 안에 두툼한 방석 하나 깔고 눈썰매를 탔더랬다. 옛날 세수대야는 크기도 어마어마했고 스테인리스로 만들어서 움직일 때마다 댕강댕강 부딪히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혼자서도 타고, 언니랑도 타고, 친구랑도 타고, 눈에 대한 기억은 그때 세숫대야 눈썰매가 제일 신나고 좋았다. 그 세숫대야는 그 후로도 본래의 기능은 못하고 몇 번의 눈썰매로 수명을 다 하고 나서야 바닥에 구멍 나서 결국은 엄마한테 꿀밤 맞고 엿 바꿔 먹었다.


땅과 가까운 곳에 사는 나는 이렇게 재미있는 일이 많은데 높이 사는 사람들도 나만큼 재미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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