甲(갑)乙(을)丙(병)丁(정)戊(무)己(기)庚(경)辛(신)壬(임)癸(계)
子(자)丑(축)寅(인)卯(묘)辰(진)巳(사)午(오)未(미)申(신)酉(유)戌(술)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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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잔치를 했다. 나이가 들면 본인은 원치 않는데 주위에서 꼭 해야 한다고 밀어붙이는 바로 그 잔치. 십간과 십이지의 육십 간지가 돌아오는 해에 하는, 예전에는 떡 벌어지게 한 상 차려야 자식들이 효자 효녀 소리 듣던 바로 그거다. 잔치 라야 식구들끼리 모여서 좋은 식당에서 비싼 식사를 하는 것뿐이지만 앞으로도 절대로 먹을 수 없을 만큼 비싼 음식은 정말 맛있었고 분위기도 좋아서 나오는 음식 모두 사진을 찍었더랬다. 고기 부위에 대한 명칭과 설명도 좋았고, 굽는 정도도 내가 애정 하는 만큼 딱이었고, 심지어 '징'하고 전동으로 갈리는 후추 기계 소리도 좋았다. 이렇게 잘 드시는 가족은 참 드물다고, 속이 니글거려 중간에 포기하는 손님들이 의외로 많다는 이야기들 들으며 우리는 '한판 더!'를 외치고 싶었지만 너무 비싸서 스킵. 갓 결혼한 딸 내외까지 우리 다섯은 정말 남김없이 다 먹어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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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가 이러니 양쪽 부모님 네 분은 모두 돌아가셨는데 그분들께는 죄송하지만 맘은 편하고 부드러워졌다. 내가 저 넘어가는 길의 번호표를 탔다는 관조의 의미도 있겠지만, 이는 내 앞에 아무도 없어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많아졌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그럼 그동안은 내 맘대로 하는 게 없었다는 뜻이냐? 그건 아니고 매사에 좀 눈치가 보였다는 건데, 이제는 눈치 보지 않고 일을 해도 뭐라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싫어하면 싫어한다고, 언제든 저지르고 싶으면 저질러도 된다는 뜻이었다.
아침에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자고 싶을 때 잔다. 식구들 아침은 각자 해결한다. 먹고 싶으면 먹고, 건너뛰고 싶으면 건너뛰고, 몇 시에 먹던 아무도 상관 안 한다. 남편의 아침은 배달 샐러드로 해결했다. 신선한 샐러드를 배달시키는 새벽 배송도 가르쳐 줘서 이제는 떨어질 만하면 알아서 시켜 먹는다. 아들은 워낙 단짠 스타일이라 특별히 좋아하는 고기가 없으면 지가 알아서 시켜 먹는다. 우리는 배달의 가족이다.
내가 대장이 아니었던 시절, 그러니까 부모님이 대장이었던 시절에는 나의 절실한 의견이 마구 묵살되었던 맘 아픈 기억이 많았다. 모든 아이들이 그러하듯 우리 자매들은 모두 개를 좋아했는데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면 키우던 개가 없어지고, 또 없어지고를 반복했다. 단독주택에 살고 있었던 우리는 엄마가 깜빡 문 열어놓은 틈에 다들 도망가서 찾을 수 없었다고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다. 개장수한테 파셨다는 걸. 도무지 딸들과는 상의도 없이 맘대로 파셨다는 걸. 울고불고 난리였지만 난 대장이 아니었으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똘복아 미안해...... 뽀삐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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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우리 집에 고양이를 들이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나는 거의 대장이었다. 개보다는 기르기도 쉽고 무엇보다 냄새가 안 난다고 해서 좋았다. 내가 키우겠다고 결정하면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었고 당연히 허락을 구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해서 업어온 아이가 '양'이다. 지금은 방년 16세의 할머니 고양이가 되었다. '양'이를 끔찍이 이뻐하는 아들에게 '고양이 몰래 잘 내다 버리기'를 아주 구체적으로 강의한 애들 할아버지에 반하여 꿋꿋이 '양'이를 지켜낸 것도 내가 거의 대장이었기 때문이고, 사료비에 캣타워, 병원비 등 온갖 비용이 개보다 훨씬 비싸다며 개를 키우지 왜 고양이를 키우냐는 친구의 말을 묵살할 수 있었던 것도 내가 대장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고양이는 괜히 무섭고 요괴 요괴해서 길양이 얼굴만 봐도 섬뜩하다는 지인에게, 얼마나 고양이가 사랑스러운 동물인지를 입에 거품 물고 설득하는 것도 내가 대장으로서 주눅이 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대장이 된다는 것은 살짝 거만해져도 된다는 것이며, 대안이 없는 불평불만은 나만의 논리로 눌러줘도 된다는 뜻이며, 이 모든 새로운 변화는 모두 내가 아닌 우리를 위한 것이었고, '거봐, 내가 뭐라 그랬어. 내가 맞다고 했지?'를 자주 말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새벽 배송을 통한 간편식사의 전통을 새롭게 정립함으로써 가족 구성원을 진정한 자급자족의 세계로 이끌었으며, 자신의 일은 아무리 하찮은 청소라로 자신이 알아서 하자는 자주독립의 일상을 수립했으며, 가족의 안녕과 평화를 위한 새로운 고양이 멤버의 영입으로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게 된 것도 모두 내가 대장이어서 가능했으렷다.
믿거나 말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