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데믹을 생각하며: 이런 걸 기대하진 않지만
코로나 시대에 얻은 것과 잃은 것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3년을 가까이 이어졌다. 코로나 팬데믹 얘기다. 3년 동안 마스크로 얼굴을 덮고 다녔다. 사회적 거리 두기, 특정 인원 이상 집합금지, 연이은 추경과 정부의 지원 정책이 이어졌다. 코로나19는 오랜 시간 우리 일상 곳곳에 관여했다. 그만큼 사회적 영향 역시 알게 모르게 강력했다. 코로나19로 우리 사회와 개인이 얻은 것과 잃은 것을 돌아봤다.
우선 코로나19 시대에 우리가 얻은 것에 대한 이야기다. 이른바 ‘코로나 시국’을 거치며 한국 사회는 ‘개인’에 대한 감각을 예민하게 익혔다. 회식 문화에서 대표적으로 드러나는 집단주의 문화는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악습이다. 한국 현대사는 ‘집단적 정상성’을 형성한 뒤 그 안에서의 비교와 질시를 통해 경쟁을 부추기고, 집단의 힘을 동력 삼아 압축적 성장을 이어온 과정이었다. 개인의 정서와 가치관, 개인적 시간과 공간의 중요성은 철저히 외면 당했다. 코로나19 시대의 ‘사회적 거리두기’는 잃어버린 개인적 시공간을 되찾아주며 개인의 정서와 가치관을 도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나아가 팬데믹은 개인의 건강이 사회 전체의 안전으로 이어진다는 감각을 길러주었다. 구로 콜센터 노동자, 쿠팡 물류창고 노동자, 집단 거주 시설 거주자 등 소외된 타인이 건강한 사회가 되어야 나의 안전이 보장된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전국민 재난지원금으로 대표되는 국가 주도의 궁휼 정책을 통해 국가가 개인의 삶을 지켜야 한다는 선례를 남기기도 했다. 개인이 희생해 국가를 지켜내야 한다는 근대적 가치관이 소멸하고, 국가가 개인의 삶을 지켜내야 한다는 현대적 국가관이 자리 잡는 순간이었다.
반면 코로나 시대에 우리의 사회적 연결성은 악화되었다. 특히 학교에서의 상호작용을 통해 사회화 과정을 거쳐야 하는 아이들의 경우 손실이 크다. 학원에 보낼 경제력이 부족한 가정이나 맞벌이 가정의 경우 학습 불평등과 사회화 과정의 격차가 극단적으로 나타날 것이 우려된다. 코로나가 빚어낸 사회적 단절은 청장년층에게도 악영향을 미친다. ‘팬데믹 블루’라거나, ‘엔데믹 블루’ 같은 신조어는 개인에게 스며든 단절의 우울이 사회적 현상으로 부상했음을 증명한다.
필자의 경우에도 그렇다. '일상회복'이라 하는데, 생각해보면 회복할 일상이 없다. 입시 경쟁에서 자유로워진 후 줄곧 비대면 시대를 살아왔다. 근 3년, 그러니까 성인이 되고 나서는 내내 이런 게 나의 일상이었다. 줌으로 수업을 듣거나, 녹화 강의를 틀어놓고 책을 읽거나, 산책을 나가 역곡천의 비릿한 냄새를 맡으며 노래를 듣거나, 저녁엔 동네 친구를 만나 맥주를 마시는 일상. 말하자면 지금 나를 기다리는 건 '일상의 회복'이 아니라 '일상의 소멸'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갑자기 찾아온 ‘코로나 이전의 일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친구들이 많다. 연결성의 단절로 힘들어하는 아이들, 기저에서 진행된 불평등의 확대로 신음하는 부모들. ‘포스트 코로나’는 단순히 바이러스의 종식에 따른 일상으로의 회귀에 머물러선 안 된다. 알게 모르게 우리의 일상에 스며든 코로나 시대의 잔해를 섬세하게 복원하는 작업이 함께해야 한다. 국가가 개인의 삶을 지키기 위해 나서야 한다는 정신이 다시금 필요해진 시점이다. 이런 걸 기대하진 않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