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생끝에골병난다 Jun 03. 2023

인생에 의미가 없을 때. Vita activa!

양귀자와 한나 아렌트. 그리고 <두 도시 이야기>


인스타그램 '매일한편' (@garbageidea_)



오후에 군대 후임이 아팠고, 일과를 빼고 싶었던 나는 전우조로 함께 의무대에 갔다. 거기 꽂혀있던 책이 <모순>이었다. 경기도 부천 시민, 그러니까 '원미동 사람'이었던 나는 양귀자 선생님의 이름만 보고 이 책을 펼쳤다.



초반부의 <모순>은 연애 소설이다. 가족과 빈곤의 서사이기도 하지만, '안진진'의 연애 이야기를 읽을 때 가장 풍부한 감정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하기에 작가의 필체가 조금 올드한 게 아닌가 싶었다. 이 책이 20세기 소설이라는 걸 알기 전까지는 그랬. 98년 작품이라면 오렌지족스러운 문장이 이해된다. "이런 거를 뭐 개성이라고 하거든여."


대신 이 책에는 다른 훌륭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대가의 문장이다. 언젠가 김영하 소설가는 "작가는 말을 모으는 사람"이라고 했다. 인간은 지혜를 언어의 형식으로 담아내고, 후대에 전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그렇다면 말을 수집하는 소설가는 곧 '지혜를 모으는 사람'이다.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오랫동안 지혜를 모아 온 사람의 문장을 접하는 특권을 누린다. 가령 이런 것들이다.


"인간이란 누구나 각자 해석한 만큼의 생을 살아낸다. 해석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사전적 정의 뿐 아니라 반대어도 함께 들여다볼 일이다. 행복의 이면에 불행이 있고, 풍요의 뒷면을 들추면 반드시 빈곤이 있고, 빈곤의 뒷면에는 우리가 찾지 못한 풍요가 숨어있다."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이독경. 사람들은 모두 소의 귀를 가졌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이런 것이 대가의 지혜 아닐까. 이 책의 표면적 주제는 제목처럼 '인생의 모순'이다. 그러니까 빈곤한 것 너머에 풍요가 있고. 행복한 것 너머에는 불행이 있고, 그 역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차가운 이성이나 책상머리의 분석 대신, 타버릴 것을 알면서 불꽃같은 순간에 다가가는 인생의 모순이 우리를 살게 할 것이다. 소설은 그런 인간의 존재적 한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엄마'의 이야기를 통해 아둥바둥 사는 우리 인생의 고단함이 곧 '삶의 의미'가 되어주는 것이라고 위로한다.


우리가 불행을 떨칠 수 없다는 것. 이것이 작가가 말하는 인간의 존재적 한계다. 시끄러운 인파 속에서 생활을 위해 분투하는 사람, 가난하고 바쁜 삶은 고단하다. 반면 고단함을 떨치고 사는 자는 '삶의 의미'를 잊고, 이내 우울이 찾아온다. 성취와 행복이 사라지면 인간은 불행해진다. 인간은 깨어있는 시간의 절반을 일하는 데 사용한다고 한다. 그렇기에 더욱 '일'은 중요하다. 그 일 때문에 매일 아침이 죽을 만큼 괴롭겠지만.


재난 같은 사랑도 중요하다. 서로를 잡아먹지 않는 이상 똑같아질 수 없는 타인들의 사랑이라 역시 괴롭겠지만.


"자유 없는 재미없는 생을 살거나 / 죽을 만큼 괴로울지도 몰라"

(인생은 금물, 언니네 이발관)







삶이 괴로운 이유는 이것만이 아니다. 작품 속 '아버지'는 '안진진'이 아이였을 때 서로의 손바닥을 맞대보곤 했다. 하지만 그녀와 아버지의 손뼉은 끝내 맞을 수 없었다. 어렸을 땐 아버지의 손이 너무 컸고, 아버지가 병든 후엔 '안진진'의 손이 너무 커졌다. 부모님은 나를 사랑하고, 나에겐 부모님이 필요했던 시절에도, 시간은 내내 흐른다. 머물고 싶은 유년기는 반드시 지나버린다. 나에게 헌신했던 부모님의 시간도 마찬가지다.


많은 예술이 삶의 특별함을 노래하지만, 사실 삶은 허무하다. 내가 특별한 줄 알았던 시절, 특별할 줄 알았던 상대와의 관계가, 시간 속에서 퇴락한다는 법칙을 거스를 수 없다. 아무리 빌어봐도 어제는 오지 않는다. 생이 주는 상실감과 허무함의 많은 부분이 여기에서 온다. 나의 무의식을 언어로 변환해 타인에게 꺼내주는 순간 고유성은 죽는다. 사실은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한다고 말해줘야만 하지만 대화는 불가능한 것처럼, 사랑은 같은 시간에 같은 크기로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책의 마지막에서 '안진진'이 깨달은 것처럼, 남은 것은 '어떤 불행을 고를 것이냐'는 문제다. 주인공은 두 명의 남자를 두고 고민하는데, 그녀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남자(김장우)와, 심심하고 계산적이지만 현실적인 남자(나영규)가 있다.


여기서 '어떤 남자를 선택할 것이냐'가 안진진의 삶의 행로를 틀어놓을 것이라면, '두 남자'를 '그녀가 택해야 할 불행'에 비유할 수 있다. 사랑을 포기하고 현실을 선택한 주인공은 '이모의 불행'을 택했을 뿐이다. 이미 손에 들린 '엄마의 불행'을 떠나기 위해.


그 길로 가면 그런 불행이 있을 것을 알지만, 소설에 나오는 모든 인물이 불구덩이를 향해 달려간다. '우리는 모두 소의 귀를 가진 존재'다. 인간은 실수를 반복하고, 그 모순의 반복 속에서 삶이 나아질 것이다.


운명적 불행을 거머쥐고, 그 불행 덕분에 행복해야 한다. 불행과 행복은 하나고, 그것이 인간의 존재적 한계다. 이 책이 내내 말하는 주제가 이것이다. 행복과 불행은 쌍둥이라는 것. 왜 작품 속에서 엄마와 이모는 쌍둥이였겠는가.


대신 소설은, 고되고 바쁜 엄마의 삶보다는, 심심하지만 무의미에 갇힌 이모의 삶을 조금 더 불행한 것으로 그린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vita activa'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활동적 삶"이라는 뜻의 라틴어 단어다. 인간은 활동을 통해서만 인간은 자유와 자아실현을 이룰 수 있다. 삶을 역동적으로 유지하려면 '노동''행동'이 필요하다.


노동은 생활을 유지하는 수단이다. 자신과 공동체에 필요한 무언가를 창조해낸다. 행동은 내가 혼자가 아님을 깨닫게 해준다. 더 나은 세상을 꿈 꾸고 창조해낸다. 노동과 행동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필수적 요소인 자율성, 효능감, 유능감과 이어진다. 그럴 때 우리는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 인간은 괜히 사회적 존재가 아니다. 생명 유지를 위한 활동과 사회적 역할 수행이 있을 때 인간은 존재 가치를 찾고 심리적 안정을 얻는다. 말하자면, 우리의 정신없는 삶이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다.




인생은 아름답지 않고, 생활은 끝없이 이겨내야 할 역경들 뿐일 때. 하지만 고통 속에서만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이 피어난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찾아오는 묘한 위안이 있다. 나만의 비극이 아니라 너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면, 그것이 우주의 법칙이라면, 내가 느끼는 슬픔과 불행 따위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가장 불행한 시절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역사도 그렇지 않을까. 가장 어리석은 시절에 최고의 현명함은 작게 움튼다. 가장 찬란한 승리의 순간에 뼈 아픈 패배가 시작된다. 역사가 강물이라면, 오른편으로 굽이친 후엔 반대편으로 흐를 차례가 온다. 우리의 믿음이 정당한 것이라면 역사는 필연코 방향을 틀어 요동친다. 광장의 봄은 흩어진 듯 보이지만, 생활의 민주주의, 공공성, 연대, 상호부조의 꿈은 시민의 마음 속에 조용히 뿌리내렸다. 행복과 좌절이 하나이듯, 절망의 겨울에 희망의 씨앗이 개화할 것이다. 프랑스 혁명 시기의 혼란을 다룬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의 서문을 소개한다.



 "최고의 시대이며 최악의 시대였고, 현명함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으며, 믿음의 시대이자 불신의 시대였다.
 또한 빛의 계절이면서 어둠의 계절이기도 했으며 희망에 가득찬 봄이었다가 절망의 겨울이기도 했다.
우리는 우리 이전에 모든 것을 얻었으며, 우리 이전의 모든 것을 잃었다. 우리는 모두 천국으로 향하기도 했으며 반대로 우리는 다른 길을 향하기도 했다."



아니, 그 시대조차 올바른 방향은 아닐지 모른다.“우리는 모두 천국으로 가고자 했지만, 우리는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 문장 또한 <두 도시 이야기>의 서문이다. 명확한 진리란 존재하지 않으니, 존재한다 해도 나는 알 수 없으니, 단지 눈 앞의 '안진진'이, 내 곁의 '엄마'가, 더 행복해하길 바랄 뿐이다. 나와 내 동료 시민들의 생활이 더 나아기질 바란다. 연적인 불행이 우리를 찾아올 때면 말해줄 이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니까, 당신은 사라지지 않아도 괜찮다고. 이 순간에도 널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니 너는  살아달라고. 그 이상의 기적을 행할 능력은 없다.


이전 21화 파리가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이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