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같은 하루

by 오늘의 햇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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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밀리의 서재 앱을 켠다. 잠을 깨 나가며 나에게 필요한 정보를 담은 책들을 주로 읽는다. 살림법이나 자기계발서 같은 책들을 읽거나, 경제 관련 책을 적게는 10분에서 많게는 30분까지 쭉 읽다 보면 자리에서 일어날 힘이 생긴다. 자고 일어난 이불을 잘 정리한 후 환기를 한다. 바깥 공기와 안의 공기를 순환시키는 이 시간은 내게 매우 중요하다. 상쾌한 공기가 내부로 들어오는 순간, 하루가 시작된 실감이 난다. 거의 동시에 로봇 청소기의 시작 버튼을 누르고, 환기 종료 시각을 위해 타이머에 10분 알람을 설정한다. 원래는 그 후 라디오를 켰는데, 영어가 미진한 아이를 위해 어제 읽은 영어 그림책 음원을 30분 정도 거실에 흐르게 틀어 둔다. 아이는 처음에는 시끄럽다며 이 방 저 방 옮겨 다니다가 이제는 포기한 듯 묵묵히 거실에 앉아 아침이 다 차려질 때까지 책을 읽는다.

나의 아침 풍경이다. 소소하지만 매일 반복하고 있는 일상이니 루틴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방학이다 보니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었고, 나는 친절한 엄마에서 히스테릭한 엄마 사이를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락내리락한다. 며칠 전 아이가 밤사이 먹은 것을 다 토해내고 열이 39도 가까이 올랐다. 밤새 나도 한숨도 자지 못한 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아침에 잠시 눈을 붙이는 아이를 따라 나도 잠들고 싶었으나, 이것저것 해야 할 일이 생각나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나 책상에 앉았다. 힘든 하루가 시작됐다. 환기도, 영어 음원도, 밀리의 서재도 열 수 없었다. 으스스한 몸을 가지고 해야 할 일을 겨우 끝내고 나니 아이는 또 토를 계속했다. 열도 높았다. 해열제를 급히 먹인 후 열이 약간 떨어진 걸 확인한 후 함께 병원에 다녀왔다.

“밖에 나와서 바깥 공기 마시니까 좀 낫다. 엄마 나 편의점에 너무 가고 싶어. 이따 가면 안 될까?”아이와 함께 나오니, 바깥 공기에 상쾌한 기분이 드는 것 같았다. 아이의 외투를 좀 더 여며준 후 함께 병원과 약국을 돌며, 장염이란 진단을 받았다. 엊그제 먹은 굴이 잘못된 모양이다. 오늘 하루는 나의 일정도 아이의 일정도 모두 빼고 종일 함께하기로 했다. 의사의 조언대로 이온 음료를 사기 위해 편의점에 들렀다. 아이가 좋아하는 것들도 사고 제과점에 들러서 나으면 먹기 위한 빵도 산다. 아이가 다섯 살 때 좋아했던 빵을 꺼내 들자 계산할 때, 내가 좋아하는 빵도 하나 끼워 넣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다. 아이는 텔레비전 시간을 평소와는 다르게 늘려준 상황이 마냥 기쁘다. 그게 아쉽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아이 옆에서 골골대는 몸을 가지고 꼭 붙어서 아이를 살피고 필요한 것들을 챙긴다. 조금 자고 싶었지만, 약을 먹어도 속이 가라앉지 않는지 아이는 계속 토를 한다.

흐느적거리는 몸을 간신히 일으켜 남편이 썰어 놓은 당근과 삶은 달걀 하나로 겨우 요기한다. 갑자기 종일 아픈 아이와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이 절망스럽다. 조금이라도 잘 수 있는 시간을 벌고 싶었으나, 쉽지 않다. 그러면서도 차라리 대신 아팠으면 좋겠다는 뻔한 생각을 한다. 아이가 조금 괜찮아졌는지, 심심해졌는지 엄마의 어린 시절을 집요하게 묻는다.

“엄마는 어린 시절에 제일 갖고 싶은 게 뭐였어?” “엄마는 뭐가 되고 싶었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뭐였어?” “여행하고 싶은 나라는?” “좋아하는 채널은 뭐 였어?”

아이에게 대답해 주며 문득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본다. 아이에게는 잘 정돈된 답을 해줘야 하지만, 나의 어린 시절은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슬픈 과거들의 집합체였다. 하지만 아이에게 해 줄 만한 긍정적인 부분들을 끄집어 이야기해 준다.

“엄마는 어릴 때 작은 상자를 좋아했어. 그래서 예쁜 상자를 보면 모아두고 거기에 엄마의 보물들을 잔뜩 넣어두었지.”

“엄마는 일곱 살 때 국선변호사가 되고 싶었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었거든.”

“엄마는 과일이 제일 맛있다고 생각했어. 매일매일 밥 대신 과일을 먹을 수 있으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엄마는 해외보다는 할머니 할아버지랑 바닷가에 가 보고 싶었어. 친구들이 바닷가 이야기를 하면 조금 부러웠거든.”

“엄마 어릴 때는 일요일 아침에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명작 만화를 잔뜩 했는데, 예전에는 텔레비전 시간을 놓치면 다시 볼 수 없어서, 너희 외할아버지가 옆에서 한 만화가 끝나면 다른 만화로 잽싸게 채널을 돌려줬어. 외할아버지는 엄마가 좋아하는 만화 목록을 다 꿰고 있었는데, 그때 조금 재밌고, 신기했던 것 같아. 그래서 매주 일요일만 기다렸어.”

그런데 대답을 해 주다 보면, 나의 과거는 어느새 알록달록 예쁜 색들로 다시 옷을 입고 조금은 상냥해져서 나에게 다시 돌아오는 느낌이 든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행복한 기억들도 많구나.’이다.

거실에서 주방을 정리하고 있는데, 아이가 “엄마 엄마~.”하고 나를 부른다. 열이 나나 싶어서 잽싸게 체온을 재고 컨디션을 체크한다. 아이는 조금 나아졌는지 함께 만화를 보자고 한다. 자기가 엄마가 좋아할 이야기를 챙겨두었다고.

아이와 함께 본 만화는 외로움을 타는 혼자 사는 여자가 어떤 홍차를 샀는데, 그 홍차는 신비한 마법이 있어, 차를 마시는 시간 동안 과거의 여러 인물이나 만나고 싶은 인물들이 차례차례 앞으로 나타난다는 이야기였다.

“왜 이 이야기가 엄마가 좋아할 것 같았어?”

“아빠가 출근하고 내가 학교에 가면 엄마는 항상 혼자 있잖아. 외로울 것 같았어.”

아이의 대답에 기특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느새 주인공 여자가 되어서 홍차를 끓인다. 화면 속에서 갑자기 홍차 앞에 산타할아버지가 나타나는 걸 보며 빵 터져서 깔깔대고 웃는다. 아이도 재밌어하며 둘이 한참을 웃는다.

“엄마에게도 저런 홍차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자주 만날 수 없는 친구도 만나고, 조금 멀리 사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도 만나고 좋을 것 같아.”

아이와 꼭 붙어있는 하루가 어느새 저물어 간다. 오늘은 영어책도 못 읽고 음원도 못 듣고, 읽고 싶은 책도 못 읽고 하고 싶은 일들도 미뤄두었지만, 뭔가 몽글몽글한 따뜻함이 차 오른다. 이미 많이 커 버린 금방 훌쩍 자랄 아이가 아쉽다. 오늘의 시간을 천천히 늘려서 오래 기억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언젠가 노인이 되면, 나는 홍차를 사서 오늘을 떠올리며 천천히 오래오래 홀짝일 게 분명하다. 그럼 아이야, 너는 오늘 모습 그대로 나타나 주어서 엄마랑 이런저런 수다를 오래 나누자. 엄마가 오늘보다 네 얘기를 더 오래오래 잘 들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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