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밭에서 4년을 더 저렇게

따끔따끔한 슬픔

by 박경이


한낮, 등에 떨어지는 초가을 햇살이 뜨끔따끔하다

손바닥 채소밭에 심은 대여섯 포기 고추의 초록 잎새 사이로 빨강이 곱다

아삭아삭 작고 여린 풋고추로 장아찌도 담고 부침개도 자주 해먹었는데

어느새 또 맺힌 고추 몇 개가 자라면서 선명한 붉음을 더하고 있다

찌개나 나물에 고명으로 요긴하게 쓰일 터이다


“내가 대학 가면 엄마가 고추밭에서 4년을 더 저렇게 엎드려 있어야 하는구나, 싶었어.

그래서 내가 대학 포기하고 애늙은이가 된 거야, 언니.”


막내 시누이가 했던 말, 내게 오랜 세월 머물며 떠날 줄 모르는 말이다

떠오르는 횟수와 통증이 줄어들긴 했으나 의미는 깊어질 뿐

그때 두 시누와 함께 나는 일시에 뜨거운 눈물을 쏟았으니

세 여자만의 자리에서 나눈 맛난 포도주 한 잔이 밀어내준 진짜 말이었다

심장을 관통한 몸말이 나오자 한동안 아뜩했더랬다

등짝을 훑어 허리로 내려꽂히는 햇살의 통렬함을 시누는 알았구나 싶었다

나는 몰랐다, 고추가 그렇게 매운 줄 전혀 알지 못했다


"엄마 키가 작잖아, 언니. 밭에 엎드려 고추 따는 엄마는 보이지조차 않았어.

나는 새빨간 고추가 엄마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며 살아."


둘째 시누이의 말이었다, 아하!

그래서 너희는 자신을 줄여서 헌신하기로 마음먹은 거였니, 희생이 아니라?

네가 원하는 것을 알고도 꿀꺽 삼키면서 스스로 그렇게 결정한 거니?

그래서 네가 이룬 가족 하나하나를 모두 돕고 약동시키는 힘을 갖게 된 거니

징징거리지도 찌들지도 않고 야들야들 생동생동 직시하는 너

상식적 진리에 따라 판단하고 지적하여 떨어낸 다음에는 오직 밝게 웃잖아


그렇지만 네 몸으로 엄마의 햇살을 막지는 말았어야 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엄마를 그렇게 지킬 일은 아니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고추밭은 엄마 몫이고 대학공부는 네 몫이라고는 더욱 말하지 못했다

나는 엄마의 애간장을 마시며 오빠언니들의 등에 붙어 대학을 다녔으니

그건 엄마의 욕망이었기에 불가능을 가능케 한

초법적 착취이자 아름다운 횡포였다

가족의 이름으로 핏줄의 끈적임으로 간절한 막내의 부름은

모두를 걷잡을 수 없게 간질이는 따끔따끔한 슬픔이었을 터이니

우리 밭의 고추는 어쩌나, 심지 말았어야 할 걸

고추가 왜 매운지 오늘 알았네

사랑이 왜 아픈 것인지도 이제사 알았네


나는 고추밭에서 몸을 일으키며 웃는 엄니가 보이는 듯 가슴이 뜨겁다

엄니 머리 위로 홀씨처럼 날아오르며 날개를 펴는 빨간 우산들을 보았다

그 가운데 하나 이상은 내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세상이 살만한 까닭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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