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에 들다

깻잎 왔어?

by 박경이


하늘은 노름꾼 표정이다. 해를 꺼낼 수도 없고 비를 보일 수도 없어 곤란하다. 8시쯤 떨어지는 빗방울 서너 개 반기며 호박꽃이 몇 개나 피었나 보러 뒷마당으로 갔다. 멋진 꽃밭을 이뤄버린 망초들이 눈에 확 들어온다. 그것대로 싱그럽고 예쁘다! 그 푸른 기세에 눌려 머잖아 뽑아주마,라고 큰소리 칠 수가 없다. 은행나무 감고 올라가는 능소화의 주홍 꽃줄기들은 좋아 죽는다. 네가 좋으니 나도 좋구나. 배롱나무 꽃덩이에게도 예쁘다고 속삭여준다. 무성한 고구마 잎새 뒤편으로 호박 줄기 더듬으며 진노랑 호박꽃을 찾는데 코 아래서 오르는 향기,는 들깨다. 흐뭇...흐흥...하아... 醉!

자잘한 꽃 닥다글 물린 작은 꽃대궁들이 가슴높이로 그득하다. 화~한 숨길 따라 단숨에 몸이 뜨며 어찔한다. 호들갑스럽게 일어서는 감각 속에 여린 잎새 달린 꽃대궁을 똑똑 따면서 그것들에게 포위된다. 들러붙더니 스며든다. 물아일체沒我一體란 말이 딱 들어맞는! 그런 게 어딨어, 어느 순간의 만족스런 오해일 뿐. 오해거나 말거나 나는 이미 나는 깻잎이고 깻잎은 나야.

두 손 가득 딴 들깻목을 그러쥐고 뛰어서 부엌으로 급히 들어섰지. 노란 함지박에 그것을 떨구자마자 손바닥 고이 들고 남편을 불렀다. 여보, 여보~~ 책상앞에 앉아 돌아보는 남편 코앞에 손바닥을 쫙 폈지. 흐흠~ 깻잎 땄어? 응, 하고 돌아나오는데 머릿속에 울리는 말은 ‘깻잎 왔어?’다. 그럼, 깻잎 왔지. 내가 깻잎이야.


깻잎에 반해 주저앉을 뻔하다니, 세상에. 얌전하게 포개져 비닐속에 들앉았어야 할 깻잎들이 온전한 그루로 떼지어 서 있었어, 그들의 향기로운 터에... 기록해야겠다. 2층으로 후다닥 올라갔다. 쓴다. 말은 나오지만 선택은 어렵고 자판을 헛치고 오타가 수두룩, 글은 길어지지 않고 손가락만 바쁘다. 머리속도 바쁘다.

이게 아닌데, 다른 낱말 없을까. 쓰고 나면 내 의도를 배신하는 말들. 선택하고 기록하지만 어느새 미끄러지고 마는 의미들, 기의는 기표를 찾지 못한다. 딱 들어맞는 단어가 없지만 없는 것도 아니라고, 몸말과 입말이 딱 들어맞는 말을 찾겠다고 우긴다. 요리조리 느낌을 만지면서 말을 추궁하는 글쓰기라는 짓거리. 무의식을 뚫는 말, 나를 고양시키고 약간의 투명함을 얻기 위해 빙빙 도는 충동 속에 있다. 내가 안다고 생각하지만 모르는 수많은 나들의 놀이, 나의 글쓰기,는 끝났다.


감동도 상황도 흩어진 뒤 잠시 앉았노라니 부엌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 들린다. 내려가니 아기꽃 달린 깻잎순이 쟁반에 수북하다. 깨밭이다. 깻잎 향 맡고 나서 남편도 얼른 밭에 나갔다는군. 노래 틀어놓고 둘이 같이 다듬었다. 그러다가 따라 불렀겠지, 떠나가는 배. 흥과 향에 취한 나는 일손 놓고 목포의 눈물을 짜자잔 넘기며 불렀지.

“여보, 너무 시끄러운가?”

“ㅎ허 동네 사람들이 막걸리 사가지고 올껴.”

“좋지, 몇 년 걸릴껴. 같이 막걸리 마시고 춤추면서 진짜 동네 사람 되는 거지. 잘 늙어가는 거야.”


앞뒷마당과 온 집안을 휘젓고 다닌 날이다. 정말 여기 사는 것 같다. 이제 정말 우리 집이고 땅인 것 같다. 나무와 꽃들에게도 제 이름을 잘 불러 줄 수 있다. 잔디와 디딤돌도 좀더 단단히 연결되는 것 같다. 남의 손으로 돌과 잔디를 깔 수는 있지만 붙들어 두는 건 시간이다. 내가 쏟은 시간, 함께 한 세월이다. 내 손과 마음을 맘대로 움직이는 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란 걸 알아갈수록, 집짓기가 왜 그리 당연하면서도 대단한 일인지도 깨닫는다. 제 집을 꿈꾸며 마침내 그려내고 손수 닦은 터전 위에 짓는 일이 얼마나 위대한 실행인지! 왜 극히 일부 사람만 가능한지. 그래서 누군가는 남의 시간이 그렇게 쌓인 집을 사는 거라고, 내가 지을 힘이 없으니. 무수한 손발과 마음이 스며들어 고요히 빛나는 집, 그 세월을 사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 뒤에 다시 얹히는 나의 시간, 우리의 세월. 그렇게 집은 지어지는 거다. 완성된 집이 어딨겠나 집은 영원히 짓는 거다. 조금씩 더 내 손으로 하고 싶은 건 더 분명하다.


탁. 탁. 탁. 빗소리, 비가 온다

초록일색의 권태를 느낄 새도 없이 여름을 녹이는 비

서두름도 망설임도 없이 무르익은 여름이 가을을 부른다

열매를 넘기려는 큰 결단이자 배신이기도 하다

서운하다 느끼지도 말도 말자

단호한 몸돌림 없이 무슨 홀로섬이 있으랴


엷은 녹우 속의 졸음

깨향이 진동하는 손끝을 코에 대고 모로 눕는다

내 집에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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