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딜 것을 견디면서

시간 속에 있다

by 박경이


연못가 화살나무 잎새들이 터질듯 붉다. 화살깃처럼 생긴 것이 가지에 붙어서 이름이 그러한가 했는데 단풍 들고 보니 색깔 때문이지 싶다. 태양 아래 타오르는 투명 잎새가 햇살 좇아 날아오르게 생겼다. 봄에는 내 뜰에 있어야 비로소 꽃인 줄 알겠더니 이젠 내 울안에 있는 나무만 가을이고 단풍이다. 나만의 가을.


화살나무 옆 감나무는 주황색 감들이 충분히 고운데 물든 잎사귀에 초록이 더러 남아 화려함을 더한다. 옴닥옴닥 많이 열린 땡감을 따서 곶감을 만들기로 한다. 반으로 살살 쪼갤 때 흘러나오는 절정의 단맛! 혀를 중심으로 온몸을 재배열시키며 미각에 집중되는 행복감을 조용히 폭발시키는 그것. 내손으로도 그런 곶감이 가능할지 의심하면서도 끈적이는 떫은 감을 깎는 어설픈 손짓에서 재미를 맛본다.


남편과 함께 앉아 50여개를 깎았다. 달아맬 차례다. 빵과 채소 봉지를 묶었던 짤막한 끈들을 모아놓은 그릇을 가져온다. 굵은 실도 필요하다. 엄니의 실패에는 30년도 더 된 이불호청 꿰매던 흰 무명실이 아직도 남아있다. 감꼭지를 실로 동여 묶은 다음 예닐곱 개씩 한 줄에 엮어 2층 처마끝 홈통에 매달아 놓으니 흐뭇하다.

다음날 벌써 한 줄이 떨어져 굴렀다. 찢어진 건 채반에 뉘어 두고 다시 매달았는데 그 다음날 비가 온다. 한동안 안 오던 비가 왜 우리 곶감 말리는데 오는 겨. 곰팡이 나면 어쩌나, 벌레 생기면, 물크러지면? 또 한 줄이 떨어져 굴러 비속에 누웠다. 쉽게 되는 것 아니로군, 깎아서 매달기만 하면 끝인 줄 알았는데.


볕이 났다! 그런데 나만 좋아하는 게 아니다. 벌들이 곶감에 붙어 잔치하고 있다. 똥파리도 요란하다. 벌레가 생기면 어떡하지. 그냥 홍시 되게 둘 걸 깎느라 고생만 했네. 오후에 보니 데크 위에 떨어진 게 더 많다. 물크러질까 또 걱정이다. 달린 것도 늘어져 곧 떨어지게 생겼다. 며칠 동안 해가 뜨고 밤이 오고 이슬이 앉는 걸 보면서 조마조마 들락날락 요리조리 자리를 바꾸어 앉혀 주었다. 매달린 감도 채반의 감도 제 할일을 하겠지, 될 대로 되겠지.


새벽, 빗소리가 제법이다. 뛰어올라갔다. 빗물까지 들어갔으니 진짜 끝이겠구나. 먹긴 어렵겠다. 물기를 살살 닦는데 속상하다. 비가 그치지 않는다. 이젠 정말 곰팡이가 나겠구나. 그동안 안 난 것만도 신기하다. 못 먹게 되더라도 끝까지 지켜보마. 그렇게 날 걱정시킨 곶감 후보들은 다음날도 건재했다.

팔 일째던가, 일부 곰팡이를 닦아 내면서 하나를 조심히 먹어보았다. 참 맛있다. 입술을 쥐어뜯도록 떫었던 그 감이 아니다. 달라져 있다, 곶감쪽으로 성큼 건너왔다. 벌과 파리가 먹고 비까지 맞았으니 곰팡이에 벌레에 금방 어찌될 줄 알고 조마조마 했는데. 견딜 것을 견디면서 찌그러진 채로 말라가며 단맛을 농축시키고 있었던가 보다. 이미 충분히 곶감이다! 새로운 피부를 만들고 옷을 갈아입으며 이름도 바뀐 거야. 오직 저만의 기쁨을 길어올리며 온전히 누리고 있던 거였어, 기꺼이 저를 내어줄 준비조차 하면서 말이야.


떨림의 순간. 굵은 주름 달고 암시랑토 않게 훤한 웃음 내보이는 어미아비들이, 그들이 부대끼며 건너온 장대한 세월이 선연했던 한 때였다. 단순해 보이는 것이 이미 복잡한 것이라더니. 복잡을 단순으로 견뎌내는 일, 그게 삶인 거야. 그게 삶임을 알면서 두려움 속에도 삶을 멈추지 않는 자신을 바라보는 거다. 시간 걸리지. 바로 그런 시간이 삶인 거다. 어떤 생도 호락호락하지 않으며 사람 하나 함부로 볼 게 아님은 수많은 애들 가르치면서 내 생을 통해 좀 알았지만 곶감도 그런 줄은 몰랐네. 세월 갈수록 명확하게 아는 것 한 가지는 오직 내가 모르는 게 많다는 사실 뿐. 그래, 모르는 건 모르는 것이다.

열흘째. 감도 나도 같은 시간 속에 있다.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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