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나를 만지지 마라 Noli Me Tangere. 觸手禁止> 아놀로 브론치노. 파리 루브르미술관
-<마리아에게 나타난 예수> 루까 지오르다노. 파리 루브르미술관
지갑의 무게가 빠진 가방이 헐렁
너무 가볍다 사람조차 졸아든 것 같다
가난한 마음은 궁전으로 그림을 먹으러 간다, 루브르
처음 보았을 때 엉거주춤 이물감을 주던 유리 피라미드는
20년 무르익어 이제 미술관 전체를 완전하게 만들고 있다
영향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드높이고 완성시켰다 아름답다
그리하여 이 그림궁전을 가득 채우는
발소리, 말소리, 가이드의 설명소리
체온과 먼지로 밀도 높은 공기는
피곤을 부르고 그림에 집중하기 어렵다, 사람아
사람들아 제발 떼지어 다니지 마라
그리고 네 맘대로
나를 만지지 마라
부활한 예수를 발견한 막달라 마리아가
반가움에 두 팔을 활짝 펴고 다가가려 하자
우아하게 몸을 비끼며 예수가 하는 말
‘나를 만지지 마라’
다가서는 마리아와 물러나는 예수
두 사람의 모습은 영락없는 춤이다
정지되려는 스텝 하나의 찰나를 두고
그들의 춤은 진행 중
정지화면이라면 곧 풀릴 듯
두 사람은 계속 멀어지며 다가간다
반 발자국 이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영원한 술래잡기
나를 만지지 마라
죽음을 경유한 예수의 몸
인간이 만질 수 없는 몸, 만지는 게 불가능한 몸
만져서 확인하고 싶은 마리아의 간절함
금지할수록 닿고 싶음, 그러나 포기할 수 있음
만지지 않고도 믿으라
믿음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
생각은 느릿느릿 싹을 틔우고 자랄 터이니
가슴에 가만히 담아두고 발을 옮긴다
그런데 혹시, 그 정지화면이 풀리면 어떡하지...
두 사람이 잡기놀이를 하다가 마리아가 다치면 어떡하나
그 삽 대장간에서 금방 만들어진 새 것 같던데...
그리고 예수는 너무 살집도 근육도 너무 통통해
생각없는 꽃미남처럼 머리도 너무 작아
잘 그린 그림이 아니야... 히히 실실 웃음 난다
그러니 정말 잘 그린 건지도 몰라 흐흐 부활의 기쁨.
지오르다노의 예수는 기형성이 느껴지는 몸이다
아직 부활중, 죽음에서 다 빠져나오지 못했다
기대어 겨우 서 있는 예수는 몸,이다
진짜 만지면 안되겠구나
부축해 줘야겠는데 만지지 말라니 어쩌나
불가능한 진리를 붙잡으려는 나를 겨우 부축하고 있는 나
나를 만지지 마라
● 나를 만지지 마라, 나를 멈춰 세우지 마라. 나를 붙잡거나 내게 다가오려는 생각을 하지 마라. 왜냐하면 나는 아버지를 향해 떠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여전히 또다시 죽음의 권능 그 자체를 향해 떠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 죽음의 권능 속에서 나 자신으로부터 멀어진다. 나는 이 봄날 아침에 저분의 밤의 광휘 속에 발을 딛는다. 이미 나는 떠나고 있다. 나는 오직 이 출발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나는 떠남이라는 행위 속의 떠나는 자이다. 내 존재는 거기에 있다. 그리고 내 말은 이것이다 : “나, 진리는, 떠나간다 Moi, la verite, je pars.”(장 뤽 낭시 『나를 만지지 마라』 이만형·정과리 옮김. 문학과지성사. 34-35ㅉ)
낭시는 좀더 말한다. “나를 만지려면 제대로 만져라, 떨어져서. 전유하려고 하지 말고 동일화하려고 하지 말고. ‘애무해다오, 그러나 만지지는 마라.’” 예수의 몸은 이미 만질 수 없는 몸, 죽은 몸이다. 살았다 할지라도 죽은 몸이며 죽었으나 살아있는 몸이라면 유령인 셈이다. 만질 수 없다. 그럼에도 만지려는 인간의 손은 이미 한계를 지니고 저만의 방식으로 작동하는 감각 경험이 내장된 자동기계일 수 있다. 프로그램화된 감각적 단어 몇 개의 환유적 반복, 편견이고 고정관념일 수 있다. 느낄 수 없는 것을 느끼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는 자들은 자주 실패하고 좌절하는 중에 틈을 내고 틈을 넓힌다. 그 틈은 세상을 향해 우리를 열려있게 하며 삶을 확장시킨다. 그림과 노는 일은 언제나 이익이 남는 장사다. 챙기고 모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