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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경이 Dec 11. 2022

푸르르 절로 솟는 이름

너는 어쩔 건데?

    - <반항하는 노예> 미켈란젤로. 파리 루브르미술관     


드농관 지하, 안개와 유령의 응시 속에

반항하는 노예가 있다, 몸부림으로 뒤틀린 근육 

눈빛마저 묶어놓은 줄들을 뜯어낼 수 있을까 

그 옆의 <죽어가는 노예>는 죽음으로 빨려든 잠이거나 

숨이 끊기기 직전의 황홀경 같은 마비로 보인다      

그러나 두 노예가 굶주림과 채찍질에 

상한 몸은 아니어서 다행이다


날조된 진술을 거부하며 고문과 죽음에 놓였던 

서경식의 형들은 전혀 다행하지 않았다*

일제부역자 처단 실패, 분단과 처절한 전쟁 

뼈저린 역사, 장기군사독재 추문의 절정

그 형들의 이름을 잊을 수 없지만 차마 부를 수도 없다

그 이름은 수많은 시민들의 이름이 되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도 없으려는 자들 덕분에 

우리는 조금 더 존재로서 살아보고 싶은 거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자들 덕택에 

타협하지 않을 수 있는 삶에 대해 생각하고 

인간의 다른 가능성에 닿아볼 수 있다

죽어 산다는 말의 뜻을 오늘 더 좀 알겠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 직후

서경식의 탄식을 나는 선명히 기억한다 

노대통령이 ‘나약하다’는 그의 표현에 나는 즉각 동의했다 

지극히 강하게 자신을 벼렸으므로 

여림을 지닐 수밖에 없는 인간의 떨림

한 올 명주실의 여운으로 끊기 

스스로 유기체적 형상을 중지시키려는 견결한 행위    

 

서경식의 탄식은 그 행위에 대한 

깊은 이해이자 완전한 신뢰였다

자신이 실행하고 싶었던 어떤 결단에 대한 

열렬한 동경과 바람이기도 했다, 응결된 고통 

그 미완의 행위에 대한 전적인 수용 

그는 어떻게 사람으로 살아낼 수 있었을까

모든 경계를 훨훨 넘나들면서도 

구區와 획劃을 가진 사람, 속세의 무뢰한이자 성자,    

  

가슴에 심어놓은 이름들 가운데 

푸르르 절로 솟는 두 개를 나는 또 붙잡지 못한다 

이름 윤동주...... 이름 노회찬...... 

그 이름들은 우리를 인간다움으로 더 좀 살고 싶게 

더불어 나누는 삶으로 움직이게 돕는다 

가끔 울컥, 뜨거운 물방울 하나만이 

진정한 동의일 수밖에 없을지라도        


반항하는 인간, 저항할 줄 아는 인간

나에게 묻는다 는 어쩔 건데? 문득

결혼과 출산을 선택하지 않는 것도

기본급여에 알바로 방콕하는 것도 

그것이 기성질서에 편입되는 삶의 능동적 포기라면

부모 세대 삶의 방식에 대한 적극적 거부라면 

이보다 더 엄청난 저항이 있을까 싶다


삶이 바뀌고 있는 중임은 분명하다

지켜보기, 때로 무능이나 쇠락처럼 보일지라도

두근두근,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무한한 신뢰


● 몇 번째인가 루브르 미술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꼭 보아두어야 할 것이 있음에도 마지막까지 남겨두고 있었다. “형, 나 지금 루브르에 와 있어. 언젠가 형이 편지에서 이야기한 미켈란젤로의 <빈사의 노예>와 <반항하는 노예>를 보고 있단 말야. 형이 직접 볼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말이 적힌 그림엽서를 형에게 보낼 작정이었다.  

   내 형들 중 하나는 베토벤을 숭앙하고 루오를 사랑해서, 필시 차입했던 책의 삽화같은 데서 보았을 이 <노예>를 예찬하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예찬 어쩌구 할 관조적인 얘기가 아니다. 그는 또 한 형과 함께 투옥되어, 이 시점까지 12년을 살았건만 석방될 희망이 없었다. 도대체 예술감상 같은 것과는 멀찍이 격리되어 있었다. 반항을 계속 하고 있지만 빈사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여행을 떠날 때부터 루브르 미술관에 가서 <노예>를 보는 것을 하나의 의무로 치부해두고 있었다. 형을 대신하여 이 눈으로 그것을 확실히 보아둘 참이었다. <노예>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형에게 보낼 그림엽서에 적을 소감을 정리해보려고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뭐라 이름하기 어려운 광풍이 소용돌이쳐서 도무지 진정할 줄을 모른다. 지상의 숙명에 묶인 인간의 고뇌라느니 육체의 어두운 뇌옥에서 벗어나 영원을 움켜잡으려고 하는 혼이라느니 그럴싸한 수사학이야 왜 없으랴. 하지만 그런 것을 쓰고 있겠는가.

‘노예’는 나의 형인 것이다.

나는 그것을 감상하고 있는 것이다....... (서경식 『나의 서양미술 순례』 창비.1993. 47-50ㅉ)         

 

                                 

*1971년 재일교포유학생 간첩단조작사건의 서승, 서준식 형제   


   

<반항하는 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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