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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경이 Dec 15. 2022

결혼, 싸움을 통한 서로의 축복

실패로써만 성공할 수 있는

   -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습작. 샤갈. 파리 들라크루아미술관

   -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외젠 들라크루아. 파리 성쉴피스성당

   -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렘브란트. 베를린국립미술관     


6월의 회색 바람이 써늘하게 휘몰리는 지하철역 

생제르맹데프레에서 청록색 대문을 찾아 걸었다

외젠의 필적과 팔레트 그리고 <사막의 마들렌>

영원한 빛의 입구를 향한 신비한 미소가 기다리고 있다

그가 참 좋아했다는 아틀리에를 가만가만 밟는다

외젠 들라크루아도 열등감을 가져본 적이 있을까  

그림에도 일필휘지 기법이 있다면 그의 것이 아닐까     


천사를 밀어붙인 야곱의 등에 읽히는 결기

밀렸음에도 전혀 힘들어 보이지 않는 천사 

만만찮지만 기꺼이 대결해 주겠다는 여유 

천사는 곧 싸움을 끝낼 터, 야곱의 환도뼈를 쳐서 

인간임을 깨닫게 한 뒤 그를 축복해 줄 터이다 

천사와의 밤샘 싸움 끝에 야곱이 원한 것은 축복

신의 축복을 통한 총체적 변화, 거듭나기

이름도 바꾸고 딴 사람 되기      


렘브란트의 천사는 자비와 사랑이 가득하다

어디 한 번 네 맘껏 해 보렴

거의 천사에게 안겨 있는 야곱 

온 힘을 다해 자신을 기울이고 애쓰며 

축복과 대답을 구하는 연약한 동시에 강한 인간 

그런 인간으로 세우려는 천사의 의지 

이렇게 인간에게 스며든 신성은 예수에 이르러 

약속이자 증표로서 변화의 가능성을 더했을 터     


천사와의 싸움은 자신과의 싸움이다 

보이는 것들의 이면을 가만히 상상하는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을 조용히 꺼내 보는 

어떻게 나를 능가하는 나로 살아볼 수 있을까

어떻게 나도 몰랐던 나를 발견할 수 있을까 

자신과 싸움으로써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천사    

  

샤갈의 야곱은 청혼하는 애인 같다 

천사의 축복을 구하며 무릎을 꿇었으니

길고 오랜 싸움을 통한 서로의 축복이라면 

변화이자 구원이라면 결혼보다 더한 게 있을까

수십 겹의 삶을 동시에 살아내는 자신과의 싸움

실패함으로써만 성공할 수 있는 결혼.     


흰 벽 사이에 내려앉은 정원은 아늑하다 

노랑·하양·분홍 장미로 넘치는 꽃바구니  

담쟁이가 비밀스런 분위기를 더하고 

보라색 으아리의 내밀한 미소에 붙들린다 

그가 이 정원을 얼마나 사랑했던가를 알겠다


돌아가는 길, 수국 화분이 줄지은 꽃집을 지난다 

수많은 작은 꽃들이 둥근 세상을 이루었다 

늘·항상·언제나 눈과 마음을 흔드는 수국·꽃송이들

하양, 파랑, 분홍 위풍당당 화려한 연대 

꽃집 벽에 기대 선 두 젊은이도 손을 잡았다

나는 숨겨놓은 정원을 보러 여길 왔구나 

집을, 사람과 삶을 꿈꾸러 여기에 온 거야  


루브르에 있는 그의 대작들을 생각해서 그런지 작품이 작다. 루브르의 천장화를 비롯하여 작품 크기만이 아니라 그의 소재가 문학적 역사적이며 서사성이 강하기 때문일 테다. 그의 붓으로 거침없이 현시되는 폭력적 장면들은 고발인 동시에 종종 왜곡이며 시대적 편견이기도 하니까.


그림을 사이에 놓고 들라크루아라는 이름이 다정하게 여겨졌을 때는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서 <꽃바구니>를 보던 때였다. 자주색 과꽃이 있어 더 좋았던 그 그림 역시 컸다. 꽃바구니를 가로 1.5미터에 담을 필요가 있나 하면서도 넘치는 향기에 행복했다. 엎어진 꽃바구니에서 쏟아진 푸짐한 꽃들의 향기를 담으며 더 넓어지는 화폭...그것보다 반이 안 되는 크기에 담은 <폭풍 속에 잠든 그리스도>는 정말 편안했다. 작은 화폭에서도 바다와 하늘은 암록색에 청보라빛으로 들썩거렸으며 예수는 어린애처럼 자고 있었으니 한 점으로 집중되는 고요였다. 성경을 소재로 한 그림에는 무심했는데 그날은 제대로 본 셈이다. 고호가 1886년 파리의 전시회에서 이 그림을 보고 감격했다는 걸 알았을 때 그 색들은 더욱 살아 날뛰었고 어쩔 줄 몰라 혼돈에 빠진 제자들의 몸짓마다 선명해졌더랬다.    

그 뒤 2014년 부다페스트미술관에서 그의 날뛰는 백마 그림을 만났다. 폭풍우 속에 앞다리를 번쩍 들고 부르짖는 <놀란 말>이었다. 뒷다리 쪽이 어설프다는 느낌이 들면서 설핏 웃음이 났다. 수채화여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스스로 변명하면서도 들라크루아도 엉성하던 때가 있었구나 싶어 좋았다. 26세에 그린 거였다. 덕분에 그와 가까워지는 중이다. 


그는 이른바 대가들 가운데 골상학적으로 건강해 보이는 사람이기도 하다. 골상학이라. 그의 자화상과 오르세에서 본 앙리 판텡라투르의 <들라크루아에게 보내는 경의>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남자들이 떼지어 있는 그림은 반갑잖은데 그 그림에서 들라크루아의 사진을 중심으로 모인 남자들은 볼만했다. 경의를 바친 만큼 불필요한 힘을 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자. 보들레르조차 보드라워 보인다. 검은 색조를 부수는 작은 꽃다발을 사진 아래 놓으면서 몸을 비껴 정면을 보는 사람(휘슬러)의 자랑찬 표정과 아울러 그 옆에 앉은 사람(화가 자신)에게 흰 셔츠만을 입힌 구성에도 경의를 바칠 만했다. 죽은 자들의 그림을 볼 때면 그 세계의 완성에 나의 참여가 필요할 것 같아 기쁘다. 그리고 그 완결을 헤집으며 맘껏 놀 수 있어 행복하다. 그리고 언제나 고맙다.


      

외젠이 그린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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