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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경이 Dec 16. 2022

고통은 내것이 아니기를

나라가 있다!

       파리 중세박물관     


나뉜 전시실이 아니라 뚫린 벽들의 연결

중첩되며 열리는 하나의 공간 또는 자리

새하얀 천정으로 햇빛 드는 방에

포 포 포 아 아 아 작은 메아리들 

꼬마 인간이 말을 시작하면서 잃어버린 

무한한 소리의 흔적들 울림들

의미체계는 사라지고 존재가 있다

중세박물관 안에는 시간이 없다     


장난감을 혼자 차지한 아이처럼 걷다가

덜컥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만난다

지나치려 해도 항상 망설임을 부르는 

예수와 인사할 수밖에 없다, 안녕하세요

가시면류관이 바싹 마를수록 매달린

육신의 무게를 감당하기가 몹시 어렵다 


단순한 기쁨과 즐거움에 빠질 때마다 나타나 

고통을 상기시키는 예수, 무한한 예수들 

삶의 근원이자 인간됨의 시작이 고통임을 

잠시라도 잊게 둘 수 없는 걸까 

각자의 고통을 아낌없이 사용하라 

발길마다 표지를 세우듯 서 있다      


고통은 내것이 아니며 내 고통은 없기를 

고통은 모두 그의 것이기를 

그의 사랑에 닿기엔 아득하지만 

예수 때문에 용서란 말이 입술에 닿아 있다 

그는 아버지를 용서함으로써 아버지가 되었으니 

참된 마음으로 인사하고 박물관을 나온다      


카페 문 앞에 자고 있던 노숙자는 

어디로 갔을까 아침밥은 먹었는지

오래된 마을에서 

몇 개의 우물을 길어올린 듯하다   

  

생각을 털고 주변을 둘러보다 갑자기 가방을 확인한다. 소매치기의 충격이 아직 작용하는 거겠다. 정확히 나를 잃어버릴 뻔한 거니까. 돈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내 일부를 잃었다는 뜻이며 자본의 전체주의에서 그 일부는 전부가 될 수도 있다. 또 나는 여권에 있는 기록일 뿐이니 나는 돈이고 여권이다. 돈과 여권이 나를 나이게 한다.      

그날은 국적이라는 말뜻도 완전히 새긴 날이었다. 달려갈 곳이 있더란 말이다. 한국대사관에 가서 도움을 요청할 때 대한민국은 손에 잡히는 실체였다. 촛불집회에 이은 정권교체 직후였으므로 ‘나라가 있다’는 생각에 가슴까지 뭉클, 대타자의 존재를 절감했다. 나는 국가를 이루는 물리적 재료일 뿐일지라도 좋았다. 정체성이 뭔가도 그날 알았다고 하는 게 옳다. 어떤 특성으로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지만 분명 있다고 가정되는 정체성이라는 게 있다면 그건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것. 오오, 대사관 문간에 붙어있던 태극문양이 그리 반갑더란 말이다.   

   

내게 정체성은 교사라는 직업으로 충분할 때가 많았다. 무난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체성이란 게 원래 변덕스러운 것 아닌가. 소통과 이해를 위한 도구인가 하면 자주 차별과 비하의 표지가 되기도 한다. 나를 무슨 말로 규정한단 말인가. 그래서일까, 요즘은 간편한 방법으로 확정된 것 같다. 돈이 정체성이다. 연봉 5000만, 7억 아파트 등, 숫자 이름표 하나면 한 방에 소통된다. 간단명료, 고도의 상징화요 추상화다. 자주 비인간 혹은 괴물의 기호일 수 있음에도 열광 받는 이름.    

 

나는 생각한다. 생각에 알맞은 양이나 질이 있으랴마는 나는 너무 많이 생각해서 곤고한 사람이다. 생각은 진정한 쾌락에 대한 방어다. 신기하지 않은가, 어떻게 a 같은 비늘들이 의미를 만들어내는지. a 같은 찌꺼기가 어떻게 개인의 구조적 특성을 가능하게 하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생각할수록 기적이랄 밖에. 무의식이 틈을 낼 때마다 부서져 내리는 의식이라는 환상구조를 다시 세우고 거듭 깨며 우리는 기적을 사는 거다. 완전히 새로울 수는 없어도 조금 다른 나를 만들며. 달라서 새로운 나를 만나며. 조금씩 더 뿌듯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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