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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경이 Dec 26. 2022

거침없이 가볍게 존재하기

석탄에서 뽑아낸 견고한 실 같은

   - <수영장의 자화상> 데이비드 호크니. 개인소장

   - <클라크 부부와 퍼시> 데이비드 호크니. 테이트브리튼미술관. 런던      

  

젖지 않는 물, 물의 그림자 

물을 모두 걸러낸 수영장에 물이라는 기표가 있다 

시선과 함께 빛으로 달아나는 색 

호크니의 그물로 걸러낸 색의 뼈

휘발되는 푸른색을 따라 스치는 슬픔

능동적 도취, 자기애의 기포들

거침없이 가볍게 존재하기 

엄청난 스승들을 먹고 발명한 새로운 

추상화,에 아찔!     


아크릴은 호크니를 위한 재료 

습기 없는 수영장, 말라 버석거리는 물

에드워드 호퍼의 건조함과 외로움의 정적 너머 

비인간의 자리까지 뒤집힌 경쾌함

자기를 바라보는 자기를 다만 비춘다 

서늘히 유보되는 결정은 사유도 거른다      


인물들은 언제나 따로이며 옆에 있어도 멀다 

각자 만든 진공 속에 상처도 고통도 면제된 인간 

어떤 세균도 없이 잘 다림질된 외로움

줄어드는 의미, 불필요한 말들

반복될 수 없으니 흔들림도 없다

말이 필요한 자들은 다른 길로 갈 것이다 

이런 탐구와 시도, 색의 배합과 배치는 계속될 것이므로 

회화는 노동이며, 노동은 우리를 단련시키며 이어지므로     


고호는 에밀 베르나르에게 이렇게 썼다 

‘예술이라는 밭에서 일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황소처럼 강한 인내심을 갖지 않으면 안되네. 그렇지만 황소는 더러운 물감 속에서 일하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지.’      


호크니의 천재성에 경탄하던 어느 날 

그의 청년 시절 집 사진을 보게 되었다 

전형적 영국식 자그마한 연립주택 이층

다락창이 나 있던 작은 방 하나, 그를 

고호 옆에 앉히며 나는 가슴이 싸했다

빌리 엘리어트의 비상을 생각하며 눈이 뜨거웠다

자신의 색들을 낳을 만큼 참 아름답다 싶던 호크니

그는 어떻게 화폭에서 고통을 지워나갈 수 있었을까     


석탄에서 뽑아낸 가늘고 견고한 실 같은  

군더더기 없는 격려, 꿉꿉하지 않은 위로 

바삭바삭 샤하게 터지는 기분 좋은 과자처럼

한 조각 가지고 싶은 선명한 삶의 언덕, 호크니

확실한 징검다리, 믿고 단단히 밟은 다음 

빨리 지나갈 것, 돌아보지 말 것.      


오호, 이렇게나 그를 많이

깊이 생각하고 있는 줄 몰랐네 

숨겨놓은 애인 또 하나 들킨 듯


<클라크 부부와 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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