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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경이 Dec 30. 2022

빛처럼 간섭하는 우리들의 메아리

보복하지 않고 담아주는 어른

    -사크레쾨르성당, 파리

     

사크레쾨르 성당을 향해 오르는 언덕길. 파란 하늘 하얀 돔, 흰색 빛들이 눈 부시다. 뒤통수가 간지러워 돌아보니 멀리 나지막이 펼쳐지는 파리 시내가 영원처럼 마음을 붙든다. 사색과 토론을 통해 거칠게 삶의 답을 찾기를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들의 도시. 혁명의 피가 스민 곳. 모든 의미와 일상의 중지, 혼돈을 뚫어낸 사람들이 새로 만든 거리, 이마를 마주 대고 어깨 기댄 집들이 다정하다. 고호의 <파리의 지붕들>이다. 비슷한 듯 다르게 이어지는 지붕과 굴뚝마다 인간다운 삶을 약속한다. 집들은 작아지며 멀어지고 더 많이 더 서로를 의지한다. 멀리 팡테옹 지붕인가 싶은 돔이 부옇게 빛난다. 근경의 황토빛 갸름한 원통형 굴뚝들, 백파이프의 연주가 카유보트의 <눈 덮인 지붕>까지 불러낸다. 오래 아득한 그리움이었던 파리, 어린이가 동경했던 그림과 화가들의 도시. 나를 만든 무수한 환상과 상징, 이야기의 장소 파리.  

     

성당의 첨탑에 올라 묵은 때 같은 동경을 내던진다. 쨍그랑 소리 들린다. 파리 시내를 힘차게 휘둘러 본 다음 한 발 한 발 계단을 딛고 내려온다. 성당을 나와 오른쪽으로 돌아가니 한 무리의 흥겨운 사람들, 신나게 노래하는 세 젊은이. 내 옆에 앉은 여성이 가볍게 몸을 흔들며 노래에 맞춰 낮게 흥얼흥얼, 화음이며 목소리가 기막히다. 공연자 일행은 아닌 것 같은데...      


“화음이 참 좋은데? 너 잘한다~” 

“응? 아, 고마워, 그냥 한 거야.” 

순식간에 환해지는 얼굴

“그냥이라구? 이 노래를 잘 아는 거라고 생각했어.”

“몰라, 음악을 좋아해서 그냥 흥얼거린 거야.” 

“모르는데 그렇게 할 수 있어? 대단해.”

“기쁘다, 정말 그랬어?” 

“즉석에서 화음을 넣었잖아. 목소리도 좋고.” 

말하는 목소리도 좋다

“그런 말은 처음 들어. 음악을 공부하고 싶긴 해.”

“연주자들과 일행인 줄 알았어. 정말 공부하길 바래.”

“고마워. 자신감이 조금 생겨.” 

노래가 끝나자 동전을 넣고 연주자들과 사진 찍는 사람들   

  

작별하고 걷다 보니 너무 싱겁게 헤어졌다 

커피 한 잔 사줄걸, 사진도 한 장 찍을걸 

어렵게 용기를 내어 떠난 첫여행 같던데 

폴란드랬나, 이름이 페니였던가, 쯧! 

페니를 모으려면 시간 걸리겠다, 그녀는 젊으니까

아니 어렸다. 페니는 곧 백 파운드가 되고 

천 파운드, 수만 유로가 될 거다       


창의성이란 홀로 떨어져나올 때만 가능한 것

존재를 떠받치는 병리적 아름다움이자 결핍에 내재한 그것 

주체가 되지 않고는 창조도 없으며 삶이랄 게 없으니 

창의성을 펼칠 공간과 필요한 말을 따라 시작되었을 페니의 여행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 숨기듯 말하고 감추듯 드러나는 자아

남을 듣지만 나를 듣고 온몸으로 나를 말하되 남을 말한다 

까닭 없는 일거수일투족이 있을 수 없는 이유 

해석 불가능한 인간의 일언일구도 없는 이유다    

  

그러나 해석은 그림자에 대한 인식이며 이면의 해석이어야 한다 

병리에서 피워올린 자신의 꽃을 발견하고 진정 기뻐하기

향기 속에서 몸서리치는 고통과 희생을 깨닫고 애도하기 

모든 사람이 공식처럼 외우는 말을 버려야 가능한 기호해독 

서로의 선택이 서로에게 미친 보이지 않는 관계의 파장들

놓음으로써 움켜쥐며 닫아야만 열리는 문들로 강제된 선택

새로운 말로 의미화할 때만 나를 뭉클 사랑할 수 있다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며 뜨거운 감사에 닿을 수 있다     

 

전적으로 나를 인정하며 깊이 안아주지 못한 아비들

거울 속에 비친 나를 환호하는 나에게 웃어주지 못한 어미들 

일찍이 탓한 다음 거듭 용서할 기회가 있었더라면  

죄책감 속에 분노를 억압하지 않을 수 있었더라면... 

아무것도 내 잘못이 아니지만 모든 게 내 탓이고 내 책임이다

금지 사이를 누비며 더 까불고 더 좀 혼날 수 있었더라면

맘껏 살아보고 싶게 이끌리는 어른을 일찍 만났더라면 

흔들고 비집어 틈을 내고 차고 부수어도 보복하지 않고* 

담아주는 어른들이 있어서 든든한 제 땅을 다질 것이니

이미 충분했는지도 모른다, 깨달음은 나중에 온다     


내게서 비롯된 모든 언행은 이미 메아리로 퍼져갔다

무수한 골짜기를 지나 다른 메아리를 만나 부서지며 

시내를 건너 다른 메아리들과 폭풍 속에 동그라미를 만들고

진눈깨비로 산들바람을 빚어 꽃눈을 틔운다

신들이 세상을 만들고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우리는

우리의 아픔으로 세상을 더 좋게 만들고 있음이 틀림없다

탄력 있는 예쁜 이름 페니, 입술을 열게 하는 수행사!      


작은 바게트를 사서 뇸뇸 뜯으며 걷는다. 테르뜨르 광장 부근, 18년 전에 왔던 식당이다 싶은 곳이 보인다. 배는 고프고 메뉴의 내용을 알 길이 없어 답답할 때 바로 옆에 앉은 여성이 한국어를 해서 얼마나 놀랐던지. 서울에서 두 차례 살았다던 프랑스 여인 덕분에 저녁은 엄청 맛있었다. 그날 막차를 가까스로 탔던 지하철역은 어디였을까. 매표기에 넣을 동전이 없어 당황하며 두리번거리던 순간에 잽싸게 동전을 넣어주던 사람. 얼굴 없는  사람이 갑자기 불꽃처럼 느껴진다. 페니 하나가 반짝반짝 페니들을 낳는다. 언제 어디서나 빛처럼 간섭하는 우리들의 메아리! 


                                                                                                                                              

* 청소년기는 성장을 의미하고 이 성장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성장이 진행되는 동안 책임은 부모 또는 대리부모들이 감당해야 한다. 이 부모역할을 맡은 이들이 책임을 포기한다면 청소년들은 거짓성숙으로 건너뛸 것이고, 그들 자신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질 수 있거나 충동을 바탕으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상실하고 말 것이다. ~ 오늘의 세계에 자신을 느끼게 하려는 청소년들의 노력은 응답되어야 하며 대면對面의 행동을 통하여 현실성을 부여해 주어야 한다. 청소년들이 삶과 삶의 활기를 갖기 위해서는 성인들을 필요로 한다. 대면은 보복하지 않으면서 또 변론하려 하지도 않는, 그러면서도 자체의 힘을 가지고 청소년을 담아주는 것을 말한다.(도널드 위니캇 『놀이와 현실』 이재훈 옮김. 한국심리치료연구소. 236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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