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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경이 Dec 31. 2022

고정된 언어의 그물을 걷고

무슨 구도가 이래?

   - <파리의 비오는 거리> 귀스타브 카유보트. 마르모탕모네미술관Musee Marmottan Monet. 파리 

   - <대패질하는 사람들> 귀스타브 카유보트. 오르세미술관. 파리         


이런 미술관이 있었구나, 전혀 몰랐어

피사로 특별전까지 한대, 어서 가자 

볼로뉴 공원 자락을 가로질러 아파트 담벼락 따라 

이름 모를 향기가 뒤통수를 땡기지만 모른 척

마르모탕씨에게 감사하며 두근두근 

살금살금 부잣집 구경을 시작한다, 앗!


무슨 구도가 이래? 

‘구도’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우산 쓴 사람들의 발걸음이 아주 가볍다 

화면 위쪽을 차지한 건물 아래로 약간 기울어진 

널찍한 거리를 따라 우산 쓴 남녀가 

화폭 오른쪽에서 정면으로 걸어온다 

빗소리 위로 이야기하며 거침없이 걷는다 

액자를 문지방처럼 딛고 나오게 생겼다      


화폭 왼편은 작은 인물 몇. 텅 비었다 

비에 반짝이는 바닥돌이 곰실곰실 웃으니              

비었다고 할 수도 없다

무슨 구도가 이렇게 뻔뻔해 

당찬 그림                                            

비를 맞을수록 행복하다 

인물도 거리도 파들파들 살아난다      


카유보트, 당신에게 반합니다

이미 대패질하는 사람들의 구도에

여러 차선으로 달려오는 직선의 흐름에 놀랐거든요 

아이들과 골마루를 닦으며 미끄러지던 기억이

깔깔 소리 드높이 불려나오더군요 

세로줄 마룻장이 힘차게 무대를 확장시킬 때 

엎드린 일꾼들은 곧 도약할 발레니노 같았어요 

단번에 유희이자 춤이 된 노동은 참 당당했습니다

공중에 올라 날개를 펼 백조들은 아름다웠지요 

당신... 말이 되려는 웅성거림이 들리지 않나요 

마룻장 따라 남은, 빗줄기가 흘린 말들인가 봐요 

품은 생각은 간질간질 자라고 돋을 것입니다      


집에 돌아와 카유보트의 그림들을 본다 

컴퓨터의 화면은 너무 많이 보이고 남김없이 보인다

잘 봤는데 서운하다 그림자 없는 몸 같다 

액자와 함께 만드는 독립세상에 존재하는 입체성이 없다 

‘그림의 안이자 바깥’인 액자와 아울러 

그림이 놓인 장소를 넘나드는 공간감이 빠졌다 

내 시선을 붙잡음과 동시에 단절하는 그것

흘림과 동시에 가두는 액자가 있어야 감상도 있다     


그래서 미술관을 간다 액자와 함께 보려고 

공부하는 자는 그림만 봐야할지도 몰라 

그래서 화집에 액자는 나오지 않는 거야 

화가가 액자를 그린 것은 아니잖아 

시선을 붙잡는 층으로서 액자는 왜 황금색일까 

똥색이기 때문이지, 아이의 첫 창조물인 똥의 빛깔 

환호하는 대지를 품은 인간의 색 


맞을 걸, 나는 이제 그림을 

조금 안다 싶게 알게 되는 것 같아 

내게 합당한 말을 찾아가는 것 같아

그 안에서 인정을 기뻐하며 의심할 수 없었던 남의 말들 

대타자의 응시 속에 고정된 언어의 그물을 걷어 내고 

아주 조금씩 내 말을 갖게 되는 것 같아

껍데기 하나 또 벗고 점점 나로 사는 것 같아     


밤. 창밖 클리치대로 풍경은 

노란색을 많이 쓴 위트릴로인가 싶은데 

무수한 피사로가 되고 시슬리가 된다 

눈감으니 진한 색채의 이미지들이 움직이고 어우러진다 

칸딘스키의 초기 그림이다 <청기사>

선이 되려고 달려가는 청기사에 사로잡힌다

그것은 촘촘히 반짝이더니 클림트가 된다 

곧 보나르처럼 혼곤해진다          


<대패질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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