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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경이 Jan 01. 2023

모리조의 고요는 숨을 쉰다

잘 마른 기쁨, 고독

   - <부지발 정원에 있는 외젠 마네와 그의 딸> 베르트 모리조. 마르모탕모네미술관

   - <모리조의 초상> 에두아르 마네. 마르모탕모네미술관     

      

아버지와 딸은 따로도 든든하다

함께 있되 뭉쳐 있지 않다

아빠에게 묻어나는 고독감도 

아이에게는 견고한 믿음이다 

충분히 자신으로 살면 이게 가능할까 

평온히 잠든 <요람>의 아이를 보는 

엄마에게서 피어나는 한 줄기 외로움에도

고독이라는 이름으로 잘 마른 기쁨이 있다

살아있음,을 숨 쉬는 외로움이 있다      


기쁨은 그렇게 뽑아올린 실들로 단단하게 짜인 추상 

그것을 딛고 그것으로 몸을 싸고 때로는 올라탄다 

자신이 원하는 삶에 근접했음,이 이런 걸까 그래서

모리조의 그림은 한 눈에 ‘나, 여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아이와 함께 하되 따로일 수 있는 여백 

침묵, 횡격막이 조용히 움직인다      


체리 나무, 자화상, 엎드려 있는 양치기여자 

물통에서 장난하는 아이들, 꽃밭...   

끊어지거나 슥 날아온 붓자국 어디선가 

연장된 거친 선들을 남기고 물러난다  

그녀는 덜 그린다, 완성하지 않으려고 그린다

부옇고 또렷하지 않은 윤곽, 호기심의 유혹 

형체들은 드러나려 하고 나는 끌어내고 싶다 

더 보고 싶다, 숨겨놓은 것들을 더 보고 싶다

작품을 마무리하고 예술을 완성하는 것은 시간 

그러나 시간에 더한 최종 완성자가 감상자라면 

나는 모리조를 거듭 완성하는 기쁨을 얻는다    

 

중단한 듯한 붓질을 이어가며 술래잡기가 벌어진다

가리고 숨긴 것을 찾는 건 매우 즐거운 일이다  

장미를 보려 쑥 들어갔더니 줄리가 모래놀이를 하고 있다 

하마터면 줄리의 장난감 강아지를 밟을 뻔 

베란다 기둥인가 했던 초록이 벤치로 드러나고 

소쿠리에는 바느질하던 옷이 담겼는데

정원 저편 여인네는 빨래를 넌다      


정밀하게 밀려오는 고요 

베르메르의 고요가 

갑작스런 발견에서 지속되는 

진공 같은 정적이라면 

모리조의 고요는 숨을 쉰다 

소리가 담긴 고요 

까르르 달그락 날숨을 쉰다      


검은 레이스 옷을 입고 비스듬히 기댄 모리조

생생히 강조된 시선 자랑하지 않는 빛남

싱그러움으로 홀리는 연한 미소 

그 시대의 여자임에도 유리한 환경에서 

맘껏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어 

생에 고맙다,고 말하며 가만히 놓이는 입술 

그 다행스러운 감사가 남긴 작은 틈


<부지발 정원에 있는 외젠 마네와 그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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