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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경이 Jan 03. 2023

우회만이 지름길

나도 너와 같았더니 너도 나와 같으리라

   - 페르라쉐즈 묘지. 파리

   - <붉은 지붕들> 까미유 피사로. 오르세미술관. 파리     

   - <밤의 몽마르뜨르 대로> 까미유 피사로. 내셔널갤러리. 런던 


페르라쉐즈역에 내려 빳빳한 햇빛을 맞받으며 걷는다

영원히 쉬는 이들을 만나러 가는 산 자들의 행렬이 길다

발자크, 드농, 들라클루아, 비제, 로시니, 도미에, 모딜리아니, 

알퐁스 도데, 이브몽땅, 마리아 칼라스, 짐 모리슨, 

사라 베르나르트, 생시몽, 막스 에른스트, 이사도라 던컨...

유명인들과 함께 묻히려는 부자들이 많아서일까

갖은 묘석과 인물상들이 눈길을 끄는 화려한 조각공원이다

사자死者들이 일제히 말한다

‘나도 너와 같았더니 너도 나와 같으리라’ 

    

까미유 피사로의 묘는 그의 붓질처럼 따사롭다 

무겁지 않은 경외감에 친근함이 솟는다   

안녕하시죠           

저는 당신의 몽마르뜨르, 클리치 대로에 머물고 있습니다

변하는 빛을 좇는 밤,밤,밤의 거리, 낮과 또 다른 낮의 풍경들

사계절 나날의 그 전념과 헌신을 가까이서 상상하고 싶었던가 봅니다 

누가 알았겠어요, 까미유

마르모땅모네미술관 특별전에서 벅차도록 당신을 볼 수 있었거든요                      

온기가 곰실거리는 집과 마을, 밭과 언덕을 보았어요

채소밭과 정원을 가꾸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지요 

다정하고 살가우며 무엇도 부러워하지 않더군요

소란하지 않은 빛과 색들의 조용한 변화는 기쁨이자 활기

제게 오래 마르지 않는 젖줄이며 위로의 샘이었습니다

의존적으로 기울지 않을 만큼의 격려로 당신은 

나를 언제나 지원받는 느낌 속에 있게 하셨어요    

  

당신이 불러낸 풍요로운 색들은 언제나 토닥토닥

움직이는 줄도 모르게 가만가만 저를 밀어주었답니다

그 정도는 너도 가능할 거라고 다독거리셨던 거죠 

오종종 겁쟁이 나는 부서질까봐 두려웠던 거예요

아주 조금씩만 변하기를 원했던가 봐요 

흔들림과 이동, 변화가 필요하다면 

고정됨이나 항상성 또한 필요하니까요 

그래야 딛고 건너며 밟고 뛸 수 있을테지요

변하지 않아야만 일 수 있는 고갱이 혹은 토대

댓돌 위에 놓인 편하고 튼튼한 신발 같은 거죠 

까미유, 

어릴 때부터 조곤조곤 들려주신 이야기 감사합니다

신발끈 매주고 멀리 지켜봐 주셔서 참 고맙습니다


쇼팽의 묘 앞에는 작은 음악회가 열리고 있다. 오스카 와일드의 스핑크스 천사는 유리 안에 갇혔어도, 날개를 펴지 않고도 난다. 모든 예술은 사랑이며 영원이다. 화분을 놓고 돌보고 묘지를 정돈하는 가족들이 많다. 영원히 사랑받는 자들의 무덤에는 꽃이나 돌, 편지, 어떤 사랑의 증표가 있다. 서로 입김처럼 주고받은 어떤 흔적이 있다. 사람들의 발길은 계속된다. 나도 잃어버린 어머니와 아버지를 찾아 방황한다. 안에 있는 것을 밖에서 찾아 남의 땅을 헤맨다. 자신의 의지와 발바닥을 갖고 싶은 자에게는 먼 길이 짧은 길이고 우회만이 지름길일 수 있으니.   

   

영혼들의 산책길을 서성대다 보니 문득, 나는 죽기 전에 ‘산장례식’을 해야지 하던 생각이 나서 움찔한다. 멋진 생각이라고 믿었는데 어리석음이며 오만이다. 장례식은 사자의 죽음을 명백히 선포함으로써 산 자들 자신의 삶을 지속시키기 위한 의례가 아닌가. 그러니 나는 그저 죽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나머지는 모두 산 자들의 몫. 그러니 죽기 전, 살아서는 오직 감사를 전하거나 용서를 구할 일이다. 함께 먹고 마시며.   


출구를 찾다가 ‘파리코뮌전사들의 벽’과 마주한다 

명실상부 언어의 장벽 앞에서 얼어붙는다 

뜨겁다, 삶은 죽음과 함께 무한이다 

죽어서도 사는 사람은 소수이되 죽은 듯 살지는 말아야겠구나

살아있는 죽은 자로 숨만 쉬어서는 안되겠구나 



● 아버지 형상 속에는 두 가지 기능, 억압의 기능과 위로의 기능이 교차한다. 같은 형상이 위협도 하고 보호도 한다. 벌을 받는 데 대한 두려움과 위로받고 싶은 욕망이 똑같은 형상에 모인다. 그래서 고통을 겪는 인간, 그리고 아이로 남아있는 어른에게 신이라는 우주적 형상이 생겨난다. 몇 번의 대체와 균형을 거쳐 신이 위로의 대행자로 등장한다. 그처럼 아버지 형상은 위로의 기능을 담당한다. ‘아버지 포기’가 위로에 대한 포기인 까닭도 거기에 있다. 이 포기는 아주 대단한 것이다. 보호받지 못하고 위로받지 못하기보다 차라리 도덕적 비난을 받기 원할 정도로 위로가 우리에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폴 리쾨르 『해석의 갈등』 양명수옮김. 한길사. 378ㅉ) 


<붉은 지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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