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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경이 Jan 04. 2023

새로운 존재의 새벽을 향해

손목에 힘을 주고 단번에

     - <케슬러 백작부인> 장 자크 에너. 장자크에너미술관. 파리

     - <레베카> 장 자크 에너. 장자크에너미술관. 파리     


37도 한낮, 불볕이다. 미술관까지 꽤 먼 길, 몽소공원을 지난다. 이 아름답고 유서깊은 공원을 그냥 통과해 버릴 수는 없다. 졸졸 퐁퐁 물소리를 샹송처럼 느끼며 벤치에 잠시 앉는다. 여기저기 그늘 아래 사람들과 더불어 완성되는 어느 여름날 공원의 한 때. 머리 위로부터 한 줄기 바람 타고 내려오는 나무들의 숨소리가 묵직하다. 아하, 나무들도 힘들구나. 훨씬 가벼워진 나는 일어나 걷는다. 조각맞추기 하나처럼 주택가에 들어앉은 미술관을 찾아내고 문을 연다. 벌떡 일어나며 땀 흘리는 나를 맞이하는 직원, 너무 더운 날이라고 먼저 인사를 한다. 더위를 떨구기에 충분한 몇 마디 말을 시원하게 등에 달고 곧 정적 가운데로 들어선다. 회랑이 있는 홀의 높다란 야자나무 잎새를 스치는 내 발소리에 미술관이 깨어난다.     


뚜벅뚜벅, 나는 영주의 부인을 알현하러 달려온  

기사처럼 나아간다. 멀리서 나를 맞이하는 백작부인

어서 오시오! 

검은 드레스 새하얀 얼굴의 귀부인... 

붉은 입술과 머리카락은 무슨 말을 품은 듯하나

눈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다, 먼 곳을 향해 있다 

사랑하지 않기 위해 드높이 머물러야 하는 선명한 꿈

정적 가운데 부유하는 금지의 말들, 움직이는 벽들

영원한 사랑의 대상 케슬러 백작부인

다시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해 물러나야 하는 자리

기사는 무릎을 펴고 힘차게 일어나 뒤로 걷는다    

   

초상화가 많다 남녀노소 무수한 얼굴들에 긴장한다

미소와 슬픔으로 관심을 부르고 사색으로 발길을 당긴다

전에 없었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초상화들

눈빛과 입술, 표정의 말들을 듣고 싶게 만든다

깊은 잠에 든 얼굴 하나를 한참 본다 

선명한 분홍빛 속에 영원한 잠, 죽은 얼굴 

아직도 떠나지 않은 죽음이 나를 본다

나도 본다 꿈~뻑, 부릅 떴으나 감은 눈에 지고 만다

문득 레베카들이 부른다 올 곳에 왔다 

빨간 옷을 입은 레베카 여럿이 눈을 뺏는다 

피하고 싶은 유령적 이름, 더위는 식은지 오래    

  

듀 모리에의 소설이자 히치콕의 영화에서 

죽은 레베카는 이름만으로도 산 자를 능가하고  

도처에 출몰하여 일상을 정지시킨다

죽은 자의 강력한 현존과 지배로 인한 혼란은 

의식을 툭툭 끊어내는 무의식이나 

실재(the Real)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지금도 에너의 레베카들은 

방어하는 내 시선을 묶고 

몸을 정물화시키는 힘을 발휘하고 있다 

나는 있어야 할 곳에 있다 a!

손목에 힘을 주고 단번에 내려긋지 못한다면

영원히 방황하다 불안 속으로 사라지고 말 것 

단호한 몸돌림! 등짝이 서늘하다 

독차지했던 미술관을 백작부인께 온전히 바친다     


나오는 길, 회랑 한쪽 옆으로 이젤들이 나란하다

사실감 넘치는 케리커처 가운데 한 장이 눈에 든다 

칼라잉크가 빚은 선으로 훤히 웃고 있는 사람들  

성, 인종, 나이가 확연히 구별되는 여덟 명 

그림 동아리 회원들의 웃음이 열여섯 배로 퍼진다 

미술관을 나간 다음에는 예순네 배가 될 거다

‘아직 동트지 않은 새로운 존재의 새벽’을 향해*     


                                                                                                                       

* 파블로 네루다의 시 <말>     

<케슬러 백작부인> 장 자크 에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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