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경이 Jan 05. 2023

아니아니, 남을 그리지 말고

우리 길을 잃자

   <젊은 자화상> 에밀 앙뚜아르 부르델. 부르델미술관. 파리 

   - <앉아있는 악마> 브루벨. 뜨레찌야꼬프미술관. 모스크바

   -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와 그의 유모의 초상> 레온 바스크트. 러시아미술관. 모스크바  

                            

초상화에 관심이 가는 중인데 오늘은 더하다 

이미지의 아지랑이 속에 한순간 급조된 것 

감출 수 없는 내 것으로 버무려진 얼굴이거나 

종종 불변의 사랑을 획득하며 연인의 먹이가 되는 얼굴

a의 빛이자 어둠이 불러낸 완벽한 허울 또는 꺼풀     


인상주의가 빛의 변화와 순간을 말하지만 

외부의 무수한 빛을 입고 반사한 입체의 내부는?

그것이 유기체라면 그 속 또는 내면의 빛과 색들은? 

그리는 이와 그려지는 이가 서로 흡수하고 반사하는

다층적 시선에 정동의 타협조차 힘든 게임이라면?  

그것이 혼자 하는 놀이, 자화상이라면 좀 더 쉬울까

위장이나 변장 눈속임의 수가 적어서 더 어려울까

이른바 계시의 출현이기조차 한 초상화나*

좋은 자화상이 쉽지 않은 까닭일 것이다     


부르델의 <젊은 자화상>, 강력한 홀림 

피가 빠지고 분열된 자아의 외양 

거꾸로 보면 머리가 깨져 죽은 모습이다

찰나적 유를 무에서 일으키고 사라지는 미끼 a

젊은 분노와 열병 같은 슬픔에 전염되고 만다 

분열의 자리에서 창조의 광기를 읽는다      


앉아있는 브루벨의 악마는 자화상의 부르델과 겹친다 

젊음의 악마성은 거대한 상실의 자리를 뚫고 

도래할 창조적 폭발의 위험을 암시한다 

수많은 아톰들의, 망설이는 무쇠팔 

몇 겹 얼음 같은 두려움을 꽃으로 깬다 

젊은 부르델, 악마도 브루벨도 모두 아름답다 

러시아 미술과 처음 만나는 자리였었다 


유모와 함께 하는 초상화,라는 독특성을 보이는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와 그의 유모의 초상> 

뒷편에 앉은 유모 쪽으로 걸어가던 세르게이가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는 듯 정지된 순간.

양육자이며 지지자로서 유모는 아직도 멀,다

웅숭깊은 사랑이 가득하나 여전히 배경이며 

보려 하지 않으면 발견되지 않는 정물,처럼 있다 

제목만으로도 '그림 같지 않은' 유모의 삶 

먹이고 보살펴 기르는 여자의 삶이 아찔했었다      


미술관은 현실이 아닌 게 아니었다 

‘하늘은 어디나 푸르다는 걸 알기 위해 

세계일주를 할 필요는 없다’고 했던 괴테조차도 

1년 9개월 동안이나 이탈리아를 돌아다녔으니 

남의 삶 구경하기, 나아가 길 잃고 헤매기는 인간의 특권 

길 찾는 모퉁이, 구석진 골목마다 덜컥 나를 만난다

헤매는 길에 생각도 길을 내며 몰랐던 나를 발견한다    

  

그렇다면 우리 길을 잃자, 자화상을 그리자

언제나 그리고 있는걸, 액자까지 만들며 사는걸

아니아니, 남을 그리지 말고 나를 그리자 

거울을 보고 그리자 자화상을 그리자

내가 원하는 나를 만들자 다시 그리자


                                                                                                                                           

*의사 가셰는 이 마지막 아를 여인의 초상과 나의 자화상을 정말 좋다고 칭찬하고 있어서 기쁘단다... 여하튼 나는 노력하고 있어. 1세기 뒤 사람들이 계시의 출현이라고 생각할 초상을 그리기를 소원한다. 나는 사람들을 사진처럼 너무 흡사하게 그리지 않고 감정이 드러나는 표정을 그리고 성격의 특성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또 그 효과를 높이는 수단으로서 색채에 대한 우리의 현대적인 지식과 감각을 이용하여 초상을 그리려 노력하고 있어. 1890년 6월 5일 고호의 편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 박홍규역. 아트북스)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와 그의 유모의 초상> 레온 바스크트


작가의 이전글 새로운 존재의 새벽을 향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