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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경이 Jan 06. 2023

존재론적 슬픔

수틴을 부르면 이상이 대답한다

   - <제복의 보이> 카임 수틴. 시립근대미술관. 파리

   - <카임 수틴의 초상> 모딜리아니. 국립미술관. 워싱턴

   - <친구의 초상> 구본웅.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제복의 보이>를 피할 수 없다 

빨강이 강렬할수록 내면의 균열도 강하다 

다리를 쩍 벌리고 허리에 손을 대어 버티지만 

제어 불가능한 시선의 흔들림, 깊은 동요 

멈출 수 없는 울림은 외형을 부수고 드러난다 

드러날 수 없는 것이 나타날 때는 휠 수밖에 없는가 

뚫고 나오며 일그러지는 호흡이자 생명 

왜곡을 무릅쓴 채 생을 붙든 부동의 동인      


덩이져 있는 그의 손들은 실패를 거듭한다 

저만의 형태를 갖게 될까 사용할 수 있을까 

존재하는 것들의 근원적 슬픔에 익사하지 않고 

제 손으로 제 이름을 기록할 수 있을까 

나를 그의 자리에 앉히지 않으려

감정적으로 이기지 않으려 하지만 자빠진다

아찔, 기운 채로 선다 피사의 사탑처럼     


모딜리아니가 그린 수틴의 초상화는 

보는 이를 찔러 둔탁한 아픔을 퍼뜨린다 

눈은 높낮이를 달리하고 손은 주저한다 

적응하고 싶지 않은 세상, 엉거주춤 

자신이 속하지 못하는 장소에서 망설인다

점점 안쪽으로 들어가는 그림 속의 수틴 

세상을 줄이며 자신을 부른다, 작별 

비틀린 세상에 어울릴 수 없음 

연민과 공감, 메마른 슬픔     


수틴과 마주칠 때마다 이상이 떠오른다 

수틴의 이름을 부르면 이상이 대답한다 

재능 가진 아픈 자 

자신의 세계를 더 나누고 싶었던 자 

말을 기대하나 목소리가 없다 이상은 삐딱하다 

두터운 색 아래 차단되는 그의 말들  

대리보충되는 끽연, 흔들림을 숨긴다     


일그러진 수틴의 그림에 나는 왜 흔들리지 않는가 

오랑주리미술관에서 던진 내 질문에 답을 찾았다 

나는 이미 일그러져 있기 때문이다 

왜곡은 새롭고자 하는 의지의 표출이며 

흔들림은 알맞은 자리를 찾으려는 동력이니

거울방의 즐거운 유희는 끝났다 수틴 안녕     


안녕, 몽빠르나스 묘지에서 기어코 다시 만난다

몇 바퀴를 애타게 돌고 돌아 찾아낸 그의 쉼자리

작은 나무가 바짝 가린 몹시 낡은 묘, 이름을 더듬는다 

콘크리트 판석을 손으로 쓸어내고 겨우 이름을 읽는다

기울고 왜곡된 세상에서 일그러지고 흔들리면서도 

그는 ‘제자리’에 대한 기대감을 놓지 않았던가 

마침내 그의 묘는 오직 네모지고 반듯하다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안녕    

 

지는 해는 미련하게 들어와 방안을 데운다, 정말 덥다. 더울수록 이곳 사람들은 더 생기가 도는 것 같다. 내가 소음이라고 부르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생의 찬가로 들릴지 모른다. 응원처럼 힘을 받을지도 모른다. 지하철이 지날 때마다 전해오는 진동은 유독 심하다. 위아래 옆집이 드르르 함께 움직인다. 갖은 차 소리까지 더하여 땅의 안팎이 모두 소음이다. 바닥부터 흔들린다. 아무것도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상징계적 확고한 믿음 없이는 살기 어려운 곳이다. 그래서 여기에 집을 얻었나 보다. 괜찮아, 무너지지 않아. 무너지러 왔잖아, 괜찮아. 다시 지으면 돼. 걱정하지 마. 내 안의 모든 소음이 나온다. 나도 소음인가. 아니, 소음과 진동이 나였던가. 내 안의 혼란과 만나 지옥이 열리는 것만 같다. 나로부터 도망갈 데는 없다. 작열하는 태양광, 진정한 여름. 기우는 해가 내뿜는 빛과 색으로 찬란한 사크레쾨르는 언제나 괜찮다고 말하며 하얗게 웃는다.  

    

● 실재(the Real)는 기다리지 않습니다. 특히 말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거기에서 자기의 존재와 딱 맞아떨어지는 존재가 된 채 사람들이 모든 것을 들을 수 있는 소음이 됩니다. ‘현실원칙’이 외부세계라는 이름하에 구성하는 것을 갑작스럽게 터져나오는 소리로 덮어버릴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자크 라깡 『에크리』 김대진외 옮김. 새물결. 460ㅉ)     


<제복의 보이> 카임 수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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