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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경이 Jan 07. 2023

마르지 않는 샘을 파도록 유혹하는

위로가 아니라 동요다

색에 홀리고 색깔을 들이키며 나이를 먹었다 

차이를 발견하지 못하는 눈에 그림들은 자주

맘에 들거나 들지 않는 유사성의 덩어리일 때가 많았다

가볍게 낚이는 놀람이나 만족감 혹은 즐거움

작은 의욕 같은 움직임을 일으키다 물러났다

기쁨이나 감사 이따금 충격적 창조성의 놀람 혹은  

불쾌감이 뒤따르는 경악과 부러움으로 떠밀지만 

보일락말락 손발을 꼼지락거리게 했을 뿐

희미한 가능성은 보이기 무섭게 사라지곤 했다

꼬리를 밟았던 흔적조차 없이 다시 시작되는 짝사랑     


대부분의 회화는 가벼운 위로일 때가 많았다 

그만하면 충분하니 욕심부리지 말라고

견디는 게 삶이니 소소하게 감사하며 살라고

쓰다듬고 어루만지며 달래주지만 허전했고

괜찮다고 속삭이지만 돌아서면 자주 쓸쓸했다 

카타르시스로 비운 자리를 채우는 의지 아닌 의지

다시 돌아가 제 자리를 지키도록 

힘 아닌 힘을 준다, 얼른 틈을 메꾼다

대타자의 역할을 하거나 이데올로기가 된다

금세 또 위로를 구하게 하는 위로를 판다 

그 이상 요구할 힘이 내게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만큼, 정말 그 정도만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마치 어떤 미래를 약속하는 듯한 힘으로 

두근거림으로 거듭 다가서게 하는 그림이 있다

결코 완전할 수 없는 인간이 

역시 완전할 수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이미 기적일지도 모른다는 인식을 단단히 딛고

마르지 않는 위로의 샘을 파도록 유혹하는 색과 빛들

새로운 나의 발현을 예고하듯 반복되는 이미지가 있다

분열된 나들과 접촉하고 접속시키는 듯한 덜컹거림

미세한 차이를 일으키며 끊임없이 건드리고 흔들어 

자극하기를 멈추지 않는 형상들이 있다 

취소될 수 없는 균열을 새기는 대상들    


스스로 금을 내라, 흔들어줄 테니 너도 흔들어 봐 

무너져야 다시 세우지, 그저 주어지지 않는 거야

단지 생존을 위해 네 동의도 없이 지은 집을

기둥을 무너뜨려야 해, 터를 새로 다져야 해

생의 명령, 부모의 간곡한 사랑인 듯 

당신들이 해줄 수 없었던 것을 가능케 돕고 싶은 

눈물·미안함이며 절규이자 호소 같았다, 내게

내가 원하는 나로 살기 위한 수십 년의 반복

알게 모르게 알알이 그리워서 미술관을 찾았음을

나를 찾아 그림을 향해 외쳤음을     


여하간 모든 화가는 마술사며 요술쟁이다

누구에게 어떤 마법을 어떻게 부리는지 

얼마나 사람들의 가슴을 계속 두드려 

고정관념을 흔들고 변화로 가게 하는지

회오리를 일으켜 뿌리를 뽑도록 하는지 

선 자리를 바꾸도록 유혹하는지가 문제다

위로가 아니라 동요의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혹과 흔들림은

개별적이며 특별한 만남이니 

한 줄기 위로만으로 짐을 벗을 수 있는 사람

삶이 잔물결 같은 사람도 있으리라

가벼운 미적 감각으로 흡족한 삶

그저 사람 하나로 살아 충분할 수 있는 삶 

증상적 흔들림이나 구조적 문제 인식이나 해석 

a 따위 알 필요가 없는 삶 말이다

혹시, 혹시 그런 삶이 가능하다면 말이다     


배부르고 심심할 때 찾던 예술, 갈수록 정보성 조각 지식이 넘치다 보니 치유의 장으로까지 불려나와 소비되기도 하지만 모든 예술가들은 정신분석가다. 그들의 창조물 자체가 성공한 정신분석의 증거다.* 자기분석을 통해 자기치유로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돕는다. 그러니 그림을 통해서 오직 자신을 만날 일이다. 프로이트 자신이 ‘조잡한’ 정신분석에 대해 자주 경고했거니와 라깡 역시 그러했듯이 화가들은 정신분석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울타리 밖 멀리까지 상상하도록 도와주는 아름다운 힘. 때로 주술 같고 신앙 같은 역할을 모르는 사이에 예술의 이름으로 하고 있었다면 예술은 개인적 주물이거나 집단적 토템이기도 하다. 자본이 코드화·프로그램화하여 일회성 소비를 부추기는 예술, 종종 맹목적일지라도 여전히 쓸모 넘친다. 


                                                                                                                                             

*예술작품자체가 성공한 정신분석을, 즉 모범적인 집단적 잠재성을 지닌 숭고한 ‘전이’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질 들뢰즈·팰릭스 과타리 『안티오이디푸스 ;자본주의와 분열증』 김재인옮김. 민음사. 237ㅉ) 

**소위 화가의 정신분석이란 언제나 위태롭고 외설스러워서 듣는 이를 항상 무안하게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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