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경이 Jan 09. 2023

반석 같은 가능성의 자리

오늘은 삶이 보인다

  - <해바라기빈센트 반 고호. 런던국립미술관

  - <키질하는 사람> 장 프랑수아즈 밀레. 런던국립미술관

  - <델프트에 있는 어느 집의 안뜰> 피터르 데 호흐. 런던국립미술관        

   

이른 아침, 딱딱해진 바게뜨를 데운다. 체리를 먹으며 런던행 준비를 한다. 어젯밤 요란하던 캔싱턴의 27층 아파트 화재도 잊었다. 칸칸이 연기와 불꽃이 이글거리는 영상을 보면서 떨었지만 런던행에 모험심을 더해주는 사건이라고 허풍을 떨며 커피를 간다. 열다섯 살 낡은 핸드밀은 뉴욕에도 함께 갔던 동무. 한 손으로 붙들고 커피콩을 갈 때마다 마음 맞추는 재미가 여름날 산들바람이다. 알맞게 식은 뜨거운 물이 커피를 적시면 살살 피어나 감사를 동반한 행복감을 부르는 깊은 향기. 감사는 다시 기대감과 힘을 부르니 오늘 당일치기 여행은 멋질 것.

파리 북역에서 유로스타를 타고 런던 세인트 팬크라스역에 내린다. 지하철은 테러 관련으로 점검 중. 승객들의 인내에 감사한다는 방송이 반복되는 중에 계속 밀려드는 사람들. 조용히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정말 놀랍다. 테러가 있어도 미술관은 있고 길도 있으니 걸어가자, 40분 거리. 오늘은 시간을 만들 시간이 없는 날이다, 믿을 것은 내 발바닥.


내셔널갤러리를 향해 속보로 걷는다 

무질서 속의 질서 

강처럼 같이 흐르다 

홀씨처럼 흩어지는 사람들     


오호, 기쁘고 기뻐라

세상 사람 모두를 환대하며 걸어오는 의자 

고흐의 의자에 앉아 해바라기를 본다 

간곡한 의지로 태양이 된 해바라기

남김없이 불태운 꽃 이파리 흩어져 날리고

네 발 아이는 두 다리로 선다

오래오래 전에 뿌린 내 해바라기 씨는 

아직 싹을 틔우지 못하고 있지만 

내일 아침에 가능할지도 모를

무수한 웃음과 알을 낳고 노래가 될  

말이 되고 시와 그림이 될 해바라기.  

Vincent 아래 Wonder라고 작게 쓴다     


노란 꽃잎을 밟으며 나는 키질하는 사람에게로 간다

키에서 무겁게 날아오르는 황금가루 

코가 간질간질 재채기가 터진다

까르르 다정한 폭발! 밀레 이전에 

그림이 잘 하지 않는 것이 노동이었다면 

키질은 습격이라 할 만큼 놀라운 소재다

살리는 삶, 살림의 일에서 번지는 고마움

밀레의 일하는 사람들 덕분에 세상이 지속되고

나도 그 든든한 세상에 속할 수 있었다     


어느 집 안뜰에 청소를 마치고 누운 솔

상쾌한 물냄새에 젖어 집도 긴장을 풀고 쉰다 

크하하, 저 막대기 좀 봐라, 우리집 이층

그늘막을 받쳐놓은 막대기랑 똑 닮았다

포도나무의 지지대를 다시 받쳐주는 지지대.

어릴 때는 나들이 가는 엄마랑 아이만 보이더니

오늘은 여인과 아이의 배경, 삶이 보인다 

곧 문간에서 셋으로 합쳐질 웃음소리도 보인다     


평화로운 삶, 베르메르풍의 생활화라고 이름 붙일까 

눈물 없이 변함없이 투정도 않고 그 자리에 있는 

배신하지 않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언덕

지루하나 무너지지 않는 쉼을 약속하는 공간 

미련함과 둔함을 포함한 반석 같은 가능성의 자리

살아 숨쉬는 인간들에게 열린 모든 것의 시작점

작은 이들의 헌신이 다져놓은 느린 시간의 대지


<델프트에 있는 어느 집의 안뜰> 피터르 데 호흐


작가의 이전글 너와 함께만 가능한 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