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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경이 Jan 10. 2023

일단 속아야 하느니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위한 무게

  - <대사들> 한스 홀바인 2세. 런던국립미술관

  -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얀 반 에이크. 런던국립미술관     

 

명성에 대한 예의로 대사들에게 안부를 전한다 

걸치고 있는 것들의 무게로 탈골될 듯한 어깨 

거슬리는 시선을 거듭 되돌리며 해골을 찾는다

이번에는 볼 수 있을까, 구겨진 종이처럼 

그림 전면에 놓인 그것을 알아볼 수 있을까 

고정된 자리를 벗어나 스스로 흔들려야 하느니 

전후좌우로 천천히 크고 작게 걸음을 옮긴다 

주의를 기울이며 홀로 스텝을 밟는다 

안정된 감상자의 자리를 떠나 방황해야 하느니

속지 않으려면 일단 속아야 하느니      


오른쪽에서 뒤로 물러나던 어느 지점 

해골의 형체가 딱 인지되어, 껌벅!  

해골의 눈구멍으로 불려 들어가

그림 안에 갇히고 만다 싶은!  

그것은 이미 내내 나를 보고 있었던가

누구의 시선, 어떤 응시일까

난데없이 뚝 끊어진 절벽 같은 화폭과 마주하며 

이미 내 시선은 방향을 알지 못했으니 

까불며 도망치다가 딱 걸린 셈   

    

그것이 다시 나를 부르는 듯 뒤돌아봤을 때 

인물들의 옷차림은 이미 빛이 바랜 듯 

물론 거만해 보이지도 않았다

나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해골은 다시 이전처럼 알 수 없는 

장난감으로 돌아가고 없었다, 나도

그림에 참여했으니 그림의 일부가 되었겠구나

무수한 그림마다 얼룩을 남기고 가는구나

그렇다면 숱한 사람들의 얼룩과 흔적으로 

화폭의 물질성은 엄청나게 변했겠구나

내가 본 것은 무엇인가, 보지 못한 건 뭘까       


에잇, 아르놀피니 부부도 보고 가자  

신부의 드레스 초록빛깔 주름은 여전히 놀라우나 

얄팍하고 싸늘한 남자의 얼굴은 지금도 싫다 

온기 없는 비열함이 읽히던 그 표정

더욱이나 오늘은 그 비겁한 정치사기꾼을 닮았다 

나는 아르놀피니 아저씨가 왜 싫은가, 내 안에 있는 것 

어떤 시선 한 조각에서 비롯된 걸까 

누구의 응시인가, 표상을 밀어올리는 중

그동안 상징계에 대타자에 엄청나게 속고 살았으니

그 덕분에 살 수는 있었으나 목숨만 부지했으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벗어나기 위한 무게

살기 위해 필요한 무게를 획득하기 위한 억압의 이름

이제는 깁스 없이도 등뼈를 세울 수 있겠다 

더 이상 속지 않고도 방황하지 않을 수 있겠다

방황과 표류를 내가 선택할 수 있다

흔들림이 필요한 때만 흔들릴 수 있다

내 뿌리인 줄 알았던 남의 뿌리를 잘라내야 할 때다

무수한 가지와 뿌리들의 진실을 들어야 할 때  

멋도 모르고 뭔가를 살리느라 죽여야 했던 나

쫓아내고 회피했던 숱한 나을 만날 때다

내가 나로 사는 날들

짧아도 긴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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