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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경이 Jan 16. 2023

격려받은 딸

내 평생 아버지를 그리워했음을

   - 프로이트기념관

   - <프로이트 초상> 살바도르 달리. 프로이트기념관. 런던      

    

1

20 Maresfield Gardens 

붉은 벽돌 하얀 창문 2층집                   

어릴 때 내가 살기로 작정했던 집  

잘 가꾸어진 장미가 피어나는 현관과 주변 

앞뜰에 알맞은 규모일 게 분명한 뒷뜰... 

바깥쪽으로 달아낸 창문까지 내가 꿈꾸었던 집이다 

중2가 스케치북에 자주 그렸으나 완성하지 못한 집 

내가 몰랐던 내 집이 그때도 여기 있었구나...     


1938년, 빈에서 나치를 피해 옮긴 집

마지막 1년, 연구하고 글 쓰고 투병했던 집 

알맞은 좌절 속에 최적의 아이 양육이 가능할 

완벽한 삶이 약속되어 보이는 집이다 

초록 잎새 촘촘한 생울타리에 붙은 표지판 

Freud Museum 프로이트 뮤지엄 

장미꽃 사이 지나 현관문 오른쪽에 다시 

작은 명판 두 개, 아버지와 딸의 이름이 나란하다    .

  

2

서재의 책들... 책상 위에 놓인 동그란 안경 

독특한 모양과 질감의 조각 같은 그의 의자 

선명한 무늬의 양탄자가 깔린 그의 카우치 

2000점 가깝다는 고고학적 수집품들 

그가 좋아한 그라디바와 비슈누 상을 발견할 수 있을까 

가로막대 앞에 서서 고개를 빼고 찾아본다 

없다 그는 없다 책들...이 있다 

기운 없이 돌아서 이층을 오른다     

 

외부로 확장되어 공간이 넉넉한 2층 층계참 

어떤 소리가 부르는 듯 이끌려 멈춘다

베고니아 화분 옆 신문기사의 제목이 눈에 띈다 

프로이트 생존 때부터 전해온 베고니아*

넓적한 붉은 잎새를 만져 본다 

베고니아가 좋아진다 맘에 드는 공간 

기억과 헌정의 공간, 상속과 계승의 장소 

벽에 걸린 거울에는 나도 들어 있다      


2층 왼쪽 벽에 프로이트의 유명한 환자 

세르게이 판케예프가 그린 늑대꿈 그림이 있고  

정면에는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에 영감을 받은 

살바도르 달리가 그린 프로이트의 초상이 걸렸다 

존경했던 프로이트에게 관심받지 못한 서운함이 실린  

컴퓨터그래픽 같은 달리의 팬 스케치는 

의식을 통제하는 무의식의 그물망처럼 보인다  

달리는 무의식을 잘 알았구나 싶다     

 

자아가 통제한다고 믿는 의식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 자아의 환상구조에 

수시로 틈을 내고 허방다리 짚게 하는 

무의식이란 것을 달리는 제대로 깨달았나 보다 

프로이트라는 범접할 수 없는 존재의 독특함과 

개별성을 넘어 미래를 표현했구나 

천재만이 천재를 알아보는구나

천재의 세계는 범상함과 정말 가깝지 않음을 알겠다.  

달리의 작품들은 그림으로 하는 자유연상이며 정신분석이니 

달리를, 초현실주의에 대해 약간 알게 된 듯

그들처럼 의식과 무의식을 맘껏 들락거릴 수 있자

현실에서 맘껏 꿈꿀 수 있자      


안나의 방, 타자기가 놓인 책상 

작은 탁자에 올려놓은 그녀의 신발 

갈색 발목 구두는 간소하다 

아버지의 전적인 지원과 어머니의 헌신을 입고 

자신의 학문을 완성한 딸 안나 프로이트

자료실에서 비엔나 시절을 더듬다 그만 나온다 

층계참에서 오래 머물며 베고니아와 함께 서성인다 

집에 돌아가면 베고니아를 키워야겠다      


3

정원에 앉는다 

무의식과 죽음충동을 발견함으로써 

인간이 인간일 수 있게 한 놀라운 사람을 생각한다 

쉬운 문장으로 씌어졌음에도 

그의 글을 읽기가 쉽지 않은 까닭은 

수천 년 거듭 다져진 기성질서와 고정관념을 

벗어나기가 그만큼 어렵고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나를 배반하는 식의 완전히 다른 

사유방식을 요구하기 때문일 게다 

새로운 말의 발명이 필요한 이유다 

무엇보다도 수많은 임상을 통해 철저하게 

현상과 경험에서 출발하여 소급적으로 

개념을 고안해 나갔으므로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연역적으로 나열되고 행해지는 

삶의 낱낱 현상들로부터 행간을 더듬어 귀납하여 

연역을 강요하는 명제들의 연원을 확인했으니

그의 개념들은 질문인 동시에 질문에 대한 답이다      


뒷뜰을 서성인다 눈 붙일 곳이 없다

유리문에 기댄 파란 수국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5년째 꽃을 피우지 못하고 애간장 태우는 

우리 집 수국에 분노하며 정원을 걷는다 

울룩불룩 떠밀던 감정이 잠잠해지고 만다 

안절부절하다 도망친다      


그의 집을 벗어나며 자꾸 돌아본다 

마을 어귀 나무들 사이에 앉은 그의 동상을 찾는다 

안녕입니다 스승님, 뒤통수가 뜨겁다             

가슴이 짜르르 심장이 왈칵 

내 평생 몹시도 아버지를 그리워했음을 깨닫는다 


4

아버지가 없어서 자유로운 게 아니라 

도처에 촘촘한 아버지-유령에 협박당하며 

옴짝달싹 못했음을 진정 알아챈다      

튼튼한 울타리이자 위로와 격려하는 기능으로써

아버지를 경험하지 못하고 

아버지 형상의 유령들에게 쫒기는 한편 

스스로 아버지를 만들고자 부유했다 

죽이기 위해 살아있어야 하는 아버지가 없었다 

다시 세우기 위해 부숴야 할 기둥을 세우지 못했다 

엄마의 욕망을 가까스로 읽은 나는 

세상에서 나이고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프로이트를 읽으며 끄덕끄덕 감탄하던 내내 

그는 격려하며 지켜보는 아버지였음을 

함께 공부하며 조곤조곤 들어주고 혼내며 

서두르지 말라고 조언하는 

엄한 아버지며 자상한 스승이었음을 안다 

프로이트와 안나가 함께 찍은 

참 잘 나온 사진을 보고도 무감동했던 까닭을 알겠다 

아버지와 팔짱을 끼고 산책하는 딸 

사진 속 안나는 자랑스럽게 ‘우리 아버지야’하고 말한다 

사랑받고 격려받은 딸의 얼굴 

누가 물어봤어? 나 아무렇지도 않아

대답하는 나는 늘 기운이 없었다     


가끔 엉뚱한 데서 도무지 까닭을 알 수 없던 

묘한 부러움이나 시기심의 근원이 이것일까 

딸과 아버지, 자신의 학문을 이룬 아버지와 딸 

안나 프로이트는 아버지가 낸 길 가운데 하나를 

자아심리학으로 발전시키면서 

평생 아이들을 이해하기 위해 시간을 보낸다 

아버지 사후 이 집에서 43년을 살았다      


5

안나는 종종 초록지붕의 앤 셜리와 겹쳤더랬다 

똘똘하고 옹골차게 자신을 살아낸 빨강머리 앤  

프로이트 부녀의 사진을 메튜나 마릴라 

그리고 앤의 사진으로 그려보면서도 좋았다

메튜 카스버트도 내 아버지상이었던가  

엄하고도 자상한 표정의 어른들 

편안하고 존경심을 부르던 허연 머리 노신부님들 

함석헌선생 송건호선생 이영희선생도 그러했던가 보다 

신영복선생은 가장 젊은 내 아버지였다 

어디로 가야할지 잠시 아뜩하다 

주저앉아 어리광을 부리고 싶다      


비탈진 계단 따라 굽도리 길로 내려간다 

거리를 휘휘 둘러보면서 지하철역으로 간다 

자꾸자꾸 뒤를 돌아본다 

안내서에서 읽은 프로이트의 말이 번쩍 가슴을 훑는다 

20 Maresfield Gardens... 메이어스필드 가든 20번지... 

Our last address on this planet 이 세상에서 우리의 마지막 주소     



●‘나’는 나를 위협하는 생각들 이미지들 상상들 바람들을 희생한 결과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반쪽의 나다. 그렇게 ‘나’가 되기 위한 삶의 희생을 프로이트는 억압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희생된 정신적인 활동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우리 삶의 기저에 남아 우리의 일부분으로서 우리 삶을 결정짓는 한계들을 만들어낸다. 

프로이트의 혁명은 인간에게 무의식이 있다는 것을 개념적으로 알게 해준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듣지 못한 우리 자신의 목소리, 즉 무의식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데 있다. 요컨대 아는 것과 존재하는 바가 통합되어 우리의 소외된 삶이 근원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 것이다. 

그는 후세로 하여금 무의식이라는 미지의 땅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도록 자신의 실패까지도 그대로 남겨놓았다. 무의식의 땅을 디딘 최초의 발견자로서 그는 자신이 그것을 어떻게 발견했는지, 어떤 도구로 발견했는지, 그런 발견을 위해 어떤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쳤는지, 자신이 아는 것과 자신이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대로 남겨주었던 것이다. 학자의 언어가 자신의 미숙함을 숨기고 완결된 지식을 전달하려고 애쓰는 언어라면 프로이트의 언어는 프로이트 이후의 인간들이 각자 자신의 무의식을 발견해나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프로이트의 언어를 읽는 것은 단순히 기성품 같은 하나의 완결된 지식을 터득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최초의 발견자가 했던 무의식의 발견을 반복하는 일이며 독자는 그러한 반복을 통해 자신의 무의식을 탐험해 나갈 수 있게 될 것이다. (맹정현 『프로이트 패러다임』 위고. 10ㅉ-14ㅉ)     

 

                                                                                                                                           

* 2015년 9월 햄스테드 지역신문. 프로이트가 소프라노 아무개씨에게 선물한 베고니아를 그녀가 자신의 대녀에게, 대녀는 다시 친구에게 분양했다. 그 친구가 길러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던 베고니아를 2015년 6월에 이 뮤지엄에도 기증했단다. 그녀는 말한다. “It's a extraordinary connection to an incredible man. 이건 엄청난 사람 하나와의 놀라운 연결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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