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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경이 Jan 27. 2023

나-불안이 말한다

상처 없이는 꿈도 없다

      -<아이 머리에서 이를 잡아주는 엄마(엄마의 의무)> 피터르 데 호흐. 레이크스미술관


1

앉아있는 엄마 무릎에 엎드린 듯 기댄 아이 

머리를 살피며 이를 잡아주는 엄마  

펌프도 보이고 광주리에 빨랫감도 담겼다 

엄마는 곧 아이의 머리를 감기겠구나

창문으로 드는 네모난 햇빛, 검은 고양이 

온기가 감도는 노란 공간, 뭉클      


나도 그랬어 

햇볕 드는 마루 

촘촘히 머리밑을 누비는 엄마 손가락은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는 신호 같았어

엄마가 넘기는 내 머리카락이 

봄바람에 눕는 보리처럼 귓가를 간지를 때

내가 엄마의 보물인 걸 알았던 거야

잘 담아낸 남의 순간은 나를 되살리는구나   

   

걱정 마라 괜찮다

그림을 보는 중에도 올록볼록 솟는 불안감

불안은 양이 아니며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존재의 조건이자 용기와 열정의 샘이다 

상처trauma없이는, 없이는 꿈traum도 없다 

꿈꾸지 않으면 상처도 없다 

상처받지 않을 것처럼 꿈꾸고 사랑하라는 말은 

새하얀 사기처럼 양면을 포함한 진리다 

그러나 누가 불안 덩어리로 살고 싶겠는가 

활활 타는 모닥불 앞의 마른 잎처럼     


2

아무 걱정도 하지 마라 괜찮다 다 괜찮다 

부러진 어린 등뼈가 오래오래 붙어가는 동안

대타자의 확인은 좀체 오지 않았다 

든든한 아버지를 본 적은 없으나 

걱정하지 않는 척 가늘게 떨던 엄마는 보았다 

괜찮다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언제나 없었고 

걱정 말라는 엄마의 말에는 걱정이 묻어 있었다 

엄마는 세상에 필요한 모든 일을 했고 

아버지는 부재였다      


폭풍우 몰아치던 날 양철지붕이 날아갈세라 

새끼줄 양 끝에 엄마가 매달던 

돌덩이는 자꾸 미끄러지는데 

지붕 대신 엄마가 날아갈까 

여덟 살 심장은 곤두박질쳤다 

뜯기듯 휘날리던 옷자락과 머리카락 

당장 내동댕이쳐질 듯 무서워 떨었으니 

억수 같은 빗물 속에 엄마는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3

미술관 앞 잔디밭 초록 햇살 아래

아이들이 비눗방울을 터뜨리며 뛰어다닌다

등을 간지럽히는 말소리 웃음소리 

이제 괜찮다

가랑잎처럼 바스락거리는 불안을 떼어놓고

암스테르담 역에서 기차를 탄다

걱정 마라     


프랑크푸르트행 기차, 창문에 굴러떨어지는 꼬마 빗방울 따라 예닐곱 살 내 딸들의 웃음도 구른다. 함께 행을 맞춰 시를 외우던 작은 입술, 끝말잇기 할 때의 통통한 목소리를 떠올려본다. 차의 뒷자리에 앉아 춤추며 노래할 때마다 우리의 회색 프라이드는 흔들리면서 자랑스러웠으리. 귓가를 간질이던 웃음소리와 전해오던 온기를 통해 우리는 더욱 든든히 이어졌겠지. 참, 참으로 사랑스럽고 예뻤더랬어. 엄청난 선물이며 기적인 줄을 모르고 그냥 살았던 거야. 그건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이 그냥 그렇게 있는 거니까. 어찌 기적을 몸에 새기고 매일을 살 수 있으랴. 멋도 모르고 누린 다음 떠나보내야 하는 거지. 그럴 거야.      


4

가랑비도 그치고 프랑크푸르트 도착. 역에서 호텔은 바로다. 닷새 동안 또 새하얀 리넨 식탁보가 깔린 호텔식당에서 아침을 먹을 수 있다. 갑자기 팥빙수와 잔치국수가 먹고 싶다, 집에 가면 바로 먹어야지. 7월이 코앞이니 집에 백합과 나리가 한창일 것이다. 3층 내 방을 둘러보니 전기주전자만 하나 있으면 되겠다. 접수대로 내려간다.     

 

“구텐 탁! 아벤트? 하하” 

“호호, 구텐 아벤트!” 

“ㅎ호호, 전기주전자가 필요해요. 여분이 있으면 주시겠어요?”

“전기주전자, 식당에 많이 있어요. 호호, 하나 드리죠. 또 필요한 것은?”

“차도 많이 주면 좋겠어요. 예쁜 도자기컵도 하나? 호호” 

“도자기 컵? 흐흐, 그것도 식당에 많죠. 기다려요. 갖다줄게요.” 

나보다 시원히 웃던 그녀는 찻주전자까지 한 벌을 가지고 왔다.       


“으와, 정말 고마워요. 이거 아주 예쁘네요.”

“호호, 이제 당신의 것이니 잘 쓰세요. 그런데 어디서 왔죠?” 

“호호, 좋아요. 한국. 알아요? 남한, 대한민국.”

“알아요. 축구 좋아하죠, 흐흐흐.” 

“네, 하하하. 난 흥미가 없지만, 흐흐.”

“오ㅡ 그래요? 하하하하, 나도 그래요.” 

와하하하...  

웃음을 타고 흐른 완벽한 대화, 흥미진진 닷새가 될 게 틀림없다.


<아이 머리에서 이를 잡아주는 엄마(엄마의 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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